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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배인도자 (펌)
  •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에는 때가 있으니』(전 3:1)  

    그 때를 분별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하는가를 깨닫고 결정하는 것은 예배 인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만약 찬양과 경배의 첫 시간에 회중 가운데 무겁게 짓누르는 영으로서 원수의 공격이 있는데 당신은 고지곧대로 이미 뽑아놓은 곡 리스트대로 감사의 찬양을 하거나 무조건 적인 찬양곡들을 한다면 아마 그 찬양과 경배 시간은 말할 수 없이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이때에는 필요한 선에서의 강력한 선포와 회중적인 기도가 돌파구를 열어줄 수 있다.

    또는 회중들 가운데서 깊은 경배의 폭발적인 흐름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당신은 그것을 조용히 “자제”시키고 예배를 마무리 한다면….    
      
    내가 찬양 경배를 인도하기 시작하고 나서 3~4년의 시간이 흐르고 정식적인 훈련의 시기에 들어가고 난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지금 드리고 있는 경배가 얼마나,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를 부분적이나마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찬양과 경배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알아야한다.
      
    첫째는 우리의 경배 가운데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에 대한 시편 22편 3절의 개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찬양과 경배 가운데 거룩하신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 혹은 기도가 주님께 향기로운 형태의 제물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찬양과 경배가 주님께 아주 높이 올라가서 셋째 하늘에 보좌에 계신 하늘에 까지 올라가면 이제는 곧 그 보좌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좌정하시는 놀라운 일이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순서적으로 - 우리의 찬양이 올라간 후에 좌정하시는 -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에 이 경배의 개념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순서를 규정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마치 그 인생이 언제 와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한한 사람의 논리로 만든 신학 속에 광대하신 하나님을 가두려하는 것과도 같다.
    어떤 것이든지 논리화, 조직화, 공식화 하려는 것은 유익할 수 도 있겠지만 유익보다는 광범위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킬 만한 위험 요소가 더 많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경배가 “얼마나” 혹은 “어디까지 올라갔는지”에 대한 ‘통찰’은 대부분 찬양이나 경배보다도 그 뒤에 따르는 더 깊은 임재 속에서 드려지는 새 노래 때에 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New Song - 사람들에 따라 Free Worship, Spontaneous song, Prophetic Song, Song of the Lord 등으로 명명 되어지지만 이상의 이름들은 새 노래의 한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일 뿐이며 가장 빈번히 사용된 성경적인 명칭은 구약의 New Song(새 노래)와 신약의 Spiritual Song(신령한 노래)이다. {참고} 대상 25:1~3, 시 33:3, 40:3, 96:1, 98:1, 144:9, 149:1 엡 5:19, 골 3:16)

    회중들이 온 맘을 다해서 경배하기 시작하면 나는 통찰하기를 “아, 이제 회중들이 온 마음과, 의지와, 힘을 다해서 경배하기 시작하는 구나” 라고 느낀다. - 그렇다고 해서 회중들이 육적으로 억지를 부리거나 악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 그리고 어느 정도 경배가 지금 현재 모인 회중 가운데 충만 하다고 느끼게 되면 정확한 시점은 규정지어 말할 수 없지만 곡을 내려두고 우리의 영을 다해 충만한 경배를 하늘에 새 노래로 올리기 시작해야한다고 통찰하게 된다.

    그리고는 영을 따라 새 노래를 올리기 시작한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나는 회중 가운에 온 맘과 의지와 힘을 다한 경배가 충만히 되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드려지는 새 노래는 육적, 혼적, 영적으로 매우 고단하고 힘이 드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 했다.
    형태적으로는 새 노래를 드릴지는 모르지만 “심히 영적으로 메마른 어떤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 하자면 새 노래 자체가 경배 모임이 드려지는 건물 자체도 넘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예배실의 천장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중들의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 속에서, 그분의 거룩과 임재의 불 앞에서 압도되어 온 마음과 의지와 힘을 다해 올리는 경배후의 마치 폭발 하는 듯이 터져 나오는 새 노래는 어떤 때는 1층천의 악한 영들이 우글거리는 육적인 대기권과 2층천의 정사와 권세의 구역을 뚫고(Breakthrough) 주님의 보좌가 있는 3층천, -사도 바울이 예기하던- 셋째 하늘 까지 올라가서 천사들도 같이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다.

    거의 이런 통찰이 올 경우에는 새 노래 후에 강한 성령의 역사로 인한 거룩한 웃음이라든가, 신유, 축사, 성령으로 넘어짐 등의 기름 부음 등이 인위적인 노력이나 자극이 없이 나타나며 직능 적으로 씨어(Seer)들에게는 동시 다발적으로 상당히 구체적이며 비슷한 내용의 환상들이 보고되어지고 나 같은 경우의 예배인도자들에게는 구체적인 내용의 “예언(적) 새 노래(Prophetic Song)”나 구체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평범한 어조의 단어들이라도 새 노래들이 나올 때 회중 가운데 마치 “바람(Wind)이나 불(Fire)로 휩쓰는 듯한” 영 뿐만이 아닌 육적인 지각과 감각으로도 느낄 수 있는 공기 중의 변화로서의 장소적인 영적 변화가 오게 된다.
    특히 바람이나 불로 그 장소를 휩쓰는 듯한 역사는 시편 104편 4절과도 무관 하지 않다.

    『바람으로 자기 사자(주의 사자, 천사, 심부름꾼)를 삼으시며 화염(불꽃, 번개)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4]

    예언적인 예배 인도자라고 한다면 이러한 시점들과 통찰들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인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회중으로서도 많은 경배에 대한 참여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분명히 이러한 시점에 대한 통찰들은 단지 경험들로서만 얻기에는 그 깊이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며 여기에는 천부적으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예배 인도자를 하도록 부르신 주님의 소명과 사명에 바탕을 둔 태생적인 예언적 기름부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이 예언적 기름부음이란 것은 단지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능하게 풀어놓는 것만을 예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뿐만이 아닌 주님의 민감한 시점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예언적인 통찰력 -그저 그 시점을 잘 알고 그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아는- 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배의 시점에 대한 예언적 통찰은 다른 모든 영적인 사역과 마찬가지로 경배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 경배의 각 시점을 놓치면, 다시는 그 시점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예언적 예배 인도자로서의 소명과 사명이 있다면 태생적인 예언적 기름 부음으로 예배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지 못하여서 태생적인 예언적 기름부음이 없다면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신의 일을 그 예언적인 기름부음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에게 위임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등” 되어지거나 “쫓겨나는 것”이 아닌 영적인 분별로 이루어진 겸손한 선택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올바로 깨닫고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며 하나님은 이런 겸손한 자를 축복하신다.

    두 번째는 당신에게 없거나 혹은 미약한 그 예언적 기름부음을 이미 그 일에 숙련된 사역자들을 통하여 훈련 받음으로서 얻을 수도 있다.
    구약의 사울왕도 선지자의 무리들과 함께 사역을 하거나 배운 것도 아닌 그저 동행을 하였을 뿐인데도 예언을 물 흐르듯이 할 수 있는 예언적 감각이 생겨났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영접한 자들로서 예수의 증거인 대언(예언)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 때의 전통 있는 벧엘의 선지 자 생도와 여리고의 선지자 생도(왕하 2:3,5)들처럼 현대의 성령 사역 학교 들을 통하여 사역자들의 균형 있는 멘토와 영적인 훈련들로 얼마든지 예언적인 것을 개발하고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모든 사역뿐만 아니라 경배 때에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거창한 사역학교 뿐만이 아니라 당신 주위에 있을지도 모르는 예언적인 예배 인도자들과의 교제만으로도 그것은 당신에게 상당히 나누어지게(Impartation)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깊고 가장 정확한 예언적인 기름 부음은 예수의 증거이신 대언(예언)의 영(계 19:10),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로서 강화되며 촉진되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글을 읽는 당신이 예배 인도자라면 그 행해야할 때와 행해야하는 일을 아는 잇사갈 자손들의 기름부음이 당신에게 임하여서 예언적인 예배 인도자로서 경배를 드리는 지금 이순간이 어떤 시점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밝히” 알 수 있기를 기도한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 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대상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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