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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성주간의 풍요로움...
  • 이틀 지난거지만...

    새벽에 드리는 예배보다

    저녁에 드리는 예배가 훨씬- 좋네요.

     

    좀 더 많은 교우들이 함께 예배하는 것도 그렇지만,

    시간적으로도 더 여유가 있는 듯 하여

    독서를 비롯한 시간 활용이 더 풍요로와 졌어요.

     

    어제 밤, 김병년 목사님의 '난 당신이 좋아' 독서를 마치고

    마음에 담겨진 글을 옮겨 실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

     

    ---

     

    해답을 가졌다는 것이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해답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 리처드 로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원망과 원수에 대한 적대감을 하느님께 모두 토로하면, 하느님의 성품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다.

    - 월터 브루그만

     

     

    삶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아픔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왜곡된 믿음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유한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 신앙이 아닐까.

    아픔 슬픔 불행을 외면하지 말고 그 자체를 인정해야

    여기서 비롯된 원망과 불평 불만 같은 부정적인 가정들을 하느님께 쏟아낼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참된 믿음, 진정한 성숙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고통의 시간에는 오직 서로 보듬어 주어야 한다.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 아픔을 나눠야 할 시간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우는 자들을 숨게 만들지 않는다.

    하느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애통해하신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말대로

    “하느님의 전 존재가 고통 속에 거하셨다. 모든 고통은 하느님의 존재 속에 있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것이 기도다.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 어린 방문이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다.

    이 험한 골짜기를 함께 걸어갈 동무가 필요하다.

    함께 묵묵히 하느님을 바라볼 친구가 필요하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서 고난의 원인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하느님은 욥이 불평하도록 허용하고 기다려 주셨다.

    나는 이제 고난의 이유를 캐묻지 않는다.

    그것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나로서는 하느님이 이끄시는 삶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곱의 삶에는 얻음과 잃음, 떠남과 돌아옴, 은혜와 고통이 함께 뒤섞여 있다.

    야곱의 축복을 이야기하려면 그의 아픔과 고통도 함께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야곱이 겪은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고 있다.

    신학자 올브라이트의 말처럼,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형통해진다는 믿음처럼 진리에서 멀어진 믿음은 없다.”

    잃음과 얻음을 반복하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하느님이 바로 축복이다.

     

     

    하느님의 뜻은 어느 직장으로 가든지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고 합법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배우자를 찾는 일도 누구를 만나든지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고난 자체를 축복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폴 투르니에의 말처럼,

    고난을 이기는 과정이 축복이지 고난 자체가 축복은 아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삶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고난의 비밀은 세월이 흐르고 끝까지 성실하게 믿음의 경주를 마친 사람에게 비로소 드러난다.

     

     

    “주님, 제게 왜 응답하시지 않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응답입니다.

    주님을 대면하면 모든 의심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다른 응답이 필요할까요?”

     C.S.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서 여왕 오루알이 순례를 마치면서 한 고백처럼,

    고난의 신비는 고난의 끝에서 우리가 그렇게 사모하던 그분을 대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 하느님의 뜻이라고 나는 믿는다.

     

     

    광야는 극복해야 할 곳이 아니라 그저 꿋꿋이 지나가는 곳이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광야를 걸으면 인내를 배우게 된다.

    소망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법을 배우게 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배우게 된다.

     

     

    삶의 부확실성이 클수록 믿음은 하느님을 더욱 또렷하게 인식하게 한다.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가 자란다.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믿음이 성장하는 출발점이다.

    모든 것에 주도권을 갖고 사는 한 믿음이 자라기는 어렵다. 그저 자신의 관리 능력만 자랄 뿐이다.

     

댓글 3

  • 박마리아

    2013.03.27 10:30

    로마서 8:35, 37 KRV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김영수(엘리야)

    2013.03.27 12:58

    하느님께서는 축복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지만 축복만 구하고 고난은 멀리할려고 하지 않았나?
    고난을 주셨을 때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내게 있는지 되새겨 보는 책이였습니다.
  • (안셀름)

    2013.03.27 17:31

    고난도 감사해야 하는데 왜 고난이 닥쳤을 때 기도하지 못하고 그 고난이 나름 행복으로 바뀔 때 비로소 감사하게 되는 얄팍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현상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며 본질의 의지까지도 위협당할 수 있는게 현실입니다. 인간적인 고뇌를 많이 느끼셨을 목사님의 책을 읽고서도 잠시의 감정에 사로 잡혔을 뿐 또 다시 잊어버리고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 주간의 예배가 있다는걸 알면서도 현실(괴산현장)에 파묻혀야 하는 제 자신도 그렇구요~~~~ 주일 날 교회가면 또 회개기도를 드려야 할 터인데~~
    신부님의 마지막 말씀의 글이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절 더욱 작아지게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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