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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글이어 희년함께 웹진에서 퍼왔습니다. 책 읽는 저와 교우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ㅋ
  • 인문학, 타인을 위한 눈물

     

     

     

    임자헌 / 희년함께 회원


    “나는 감정이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이따금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다들 알다시피 얼마 전 내가 몹시 좋아하던 여자와 무사히 결혼을 했다. 사귈 때도 결혼하고도 그녀는 매우 지혜롭고 나를 많이 배려해주는 편이다. 내게 넘치도록 좋은 아내다.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아내의 부모님도 별 탈 없이 건강하시다. 형제들도 별 일 없다. 지금 사는 신혼집은 전셋집인데 적당한 가격에 깨끗하고 좋은 집을 구해 만족스럽다. 아내는 임신을 했는데 태아도 아내도 건강하단다. 회사 사정도 좋고 회사에서의 나의 위치도 매우 안정적이며 사원들과의 관계도 좋다. 아내가 요즘 무릎이 좀 아프다는데 그것 말고는 근심이 없다. 기도제목은? 꼭 있어야 하나? 가끔은 행복에 겨워 기도제목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지 않은가? 없다.”


    위의 이야기는 언젠가 교회 조별성경공부 리더모임에 갔다가 기도제목 나누는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다. 당시에 나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쓴 『탐욕의 제국』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브라질 빈민들의 상황, 배고픈 아이들이 밥을 달라 칭얼거리니 냄비에 돌을 넣고 끓이면서 곧 음식이 될 거라고 곧 음식이 다 될 거라고 아이를 속이며 아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 이미 상한 쓰레기를 뒤져 음식을 구하는 장면을 보면서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 책을 읽다가 도착한 리더 모임에서 나는 저 기도제목을 들었고 실망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내 가정이, 내 삶이 안정되니 기도제목이 없는 것, 그리고 그렇다고 어떻게 기도제목이 없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 않는 모임의 모습 어디쯤에 사랑이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데 우리는 그 ‘사랑’의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회심한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예수를 본받겠다는 사람도 그저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해도 내가 다리 아픈 날은 버스에서 자리 비켜주기 싫고, 나는 여직 백수인데 대기업에 연봉 빵빵하게 받으며 취직한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없고, 나는 마흔이 다 되어가도록 애인도 없는데 이제 서른 둘 주제에 ‘결혼이 늦어져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주셨네요.’라고 앙큼스럽게 말하며 청첩장을 주는 후배가 밉고, 내 자식은 어디든 그저 대학만 가도 감지덕지인 형편인데 성적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으면서 고액 과외로 떡을 쳐서 소위 명문대라는 데에 들여보내놓고는 더 좋은 대학 못 보냈다며 아쉬워하다가 ‘모두 주의 은혜지요.’라고 결론을 맺는 어떤 집사에게 웃음이 안 나온다. 당연한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내가 아프면 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그냥 둬도 좋은 것은 또 아니다. 그렇다면 어떡할 것인가? 이기심이 요동칠 때 어떡할 것인가? 울며 기도할 것인가? 울며 기도해도 사라지지 않으니 친구에게 슬쩍 말해봤다가 ‘사실 그건 그래.’라는 동의를 얻으며 마음에 안식을 얻을 것인가? 물론 기도도 하고 절망하며 울기도 해야 하겠지만 이것은 인간인 이상 평생 짐 지고 가야 하는 장기적인 싸움이지 한 순간 치료될 수 있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줄곧 기도만 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절대 살 수 없고,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기준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가 되어버린다. ‘나’라는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말만 말하고 들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알은 단단하고 여러 겹이다. 또 한 번 깨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해나가야 하는 작업이다. 이 알을 깰 망치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을 향한 눈물이 그 망치가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향한 눈물은 내가 내 마음속에 멋대로 이미 규정해놨던 ‘그’를 버리고 진짜 ‘그’가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기 시작할 때 시작된다. 성경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이사야가 아니다. 각기 자기의 독특하고 고유한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윗이 아브라함으로 대체될 수 없고, 아브라함이 이사야로 대체될 수 없으므로 성경은 이야기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쓰여 있는 책이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쓰여 있는 책이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그 다양한 삶을, 그 다양한 비극과 희극을, 그 다양한 아픔과 기쁨을, 그 다양한 분노와 행복을 이해해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해갈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인간의 이야기는 시와 소설, 수필, 역사책 등에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들은 시간 날 때나 읽어도 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내 삶을 걸었다고 감히 고백한다면 자기계발서나 영어교재, 기타 외국어 교재들에 앞서 먼저 손에 잡아야 한다. 이런 책을 읽으며 타인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인간이 이룬 사회와 그 구조의 모순 속에서 희노애락을 겪는 모습을 보고 느끼며 내 삶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어쩌면 진짜 기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친구를 만나고 직접 여러 현장에 나가보는 것도 중요한 기도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책을 통해 경험을 공유하고 인식의 연대를 이루면서 그 한계를 최대한 뛰어넘어 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의 얼굴은 평등의 얼굴이었다. 예수님은 부자가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를 지니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집도 없는 떠돌이 가난뱅이로 사셨다. 그래서 그분은 무언가를 ‘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받던 자들, 병으로 고생하던 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왔다. 성경을 읽으면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신기했다. 참 막막한 분에게 막막한 사람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차차 성경을 읽어가며 나는 예수님에게서 눈맞춤을 발견했다. ‘안다, 내가 안다.’라는 위로. 베풀어주는 자들이 보였던 시혜와 수혜의 불평등한 수직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은 눈과 눈을 마주보아주셨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자비든 사회운동이든 그 구호 이전에 필요한 것은 평등한 눈맞춤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평등한 얼굴.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최우선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해 내가 나를 위해 흘리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건조하고 추운 밤이었고, 바람이 매섭게 불었으며, 하얀 서리가 짙게 덮여 있었다. 이런 날 습지에 누워서 밤을 보내는 사람은 죽고 말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별을 바라보았는데, 사람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그들 가운데 아무런 도움이나 동정의 손길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 죽어 간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을 하고 있는 소년 핍은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누나 집에서 대장장이로나 키워질 운명으로 살고 있는 막막한 처지이다. 그런 핍이 자기를 이해해주는 매형인 조가 지펴준 불 앞에서 따스함을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별을 보며 감상에 젖는 것 말고 타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배웠다. 엔도 슈샤쿠의 『깊은 강』을 읽으면서 다른 종교와 시간과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예수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한참동안 고민하고 묵상했고,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를 읽으면서는 인간이 선물 받은 감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감격에 겨워 깨닫다가 주책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며,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빌어주시는 대상이 바로 ‘인간’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너도, 그도, 이들도, 저들도, 그들도 전부 동등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저는 세 번까진 용서해요. 그렇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어요. 딱 끊어버려요. 도저히 맞지 않고 만나면 미움만 생기는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도 다들 걔가 너무 이상하대요, 그런데 굳이 만날 필요가 있나요? 제 맘만 상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내 평생이 다하도록’ 참으신다. 하나님은 세 번 만에, 길어야 너덧 번 만에 서로를 버리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그렇다면 이제 막연하기 그지없고 아무 기준도 없는 ‘타인에 비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내 삶의 정당함’을 기꺼이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봄이다. 생명이 피어나는 봄이다. 나에게도 새순이 피어나야 조화로울 것이다. 내 욕망과 야심만만함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책들과 시간계획들을 하나님 앞에서 과감하게 버리고 간절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인문학 책들을 손에 들어보아야 할 즈음이 아닐까? 시를, 소설을, 수필을 펼쳐 인간을 가슴에 품는 계절로 올봄을 맞이했으면 한다.


    나는 봄을 기다리는 그대와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를 나누고 싶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댓글 2

  • 안셀름

    2013.03.10 20:21

    "해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향하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라고 하더군요.
    항상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면서 모든일에 적극적이었지만 늘 남는건 허전함과 세상일로 인한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많은 내 자신 뿐임을 고백해 봅니다.
    그동안 철저히 무관심 했던 , 그리고 곁눈질만 했던 나의 본질에게 따뜻한 봄을 선물하고 싶은데
    아직은.....
  • 김장환엘리야

    2013.03.12 08:49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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