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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 미제라블 - 희망을 노래하다. 한겨레신문에서 퍼온 글.
  •   영화는 버려져 물 위에 떠다니는 삼색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바리케이드 위의 거대한 군중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진 삼색기로 끝이 난다. 버려졌던 깃발이 군중들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가 의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원작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희망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는 의도이기도 하다. "내일은 오리라~"는 가사로 끝나는 영화 엔딩부의 '희망의 노래'는 이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잘 압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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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미제라블'은 크리스천 관객들에게 중대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스스로 보석 같은 

    생명을 허망하게 내던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이유를 들려주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이 영화는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하지만 간단하게 해피엔딩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도리어 영화는 새드앤딩을 의도하고 있다. 허망하게 죽어 간 청년들의 죽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으니 말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15년부터 1832년까지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다.


      여기서 간단한 역사 공부를 해 보자. 1789년, 신흥 시민계급과 민중들은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 아래 왕-귀족-승려 계급의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놓은 구체제(Ancient Regime)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의 결과 1792년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정이 탄생한다. 이 공화정을 접수한 자는 프랑스 혁명의 위대한 이상의 전도사로 자처한 나폴레옹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화정을 황제정으로 바꾸어 버렸다.

     

      1815년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실각하자 구체제 세력들이 다시 왕정을 복원시킨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삼색기는 금지되고, 프랑스 혁명의 위대한 이상은 퇴색되어 갔다. 권위주의가 부활하고 수구 세력의 역사적 반동은 극에 달했다. 그와 함께 민중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 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판틴, 코제트, 노동자, 창녀 등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묘사는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한정 전진할 것 같은 역사는 끝 모를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15년이 흘러갔다. 민중들과 진보주의자들의 인내는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드디어 또 한 번의 혁명이 일어난다.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민중들이 봉기했다. 이것이 1830년 7월 혁명이다. 혁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영광의 3일' 간의 전투를 통해 왕은 하야하고 권력은 다시 시민과 민중에게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부르주와 시민계급은 민중들의 피값을 엿 바꿔 먹어 버렸다. 그들은 입헌군주제의 미명하에 공화정이 아니라 새로운 왕정을 지지했던 것이다. 7월 혁명은 귀족들의 특권을 부르주와가 꿰찬 것 말고는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특히 7월 왕정은 산업화 초기의 프랑스 부르주와에게 유리한 친기업적 정책을 옹호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끔찍한 시절이 되고 말았다. 또 한 번의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7월 혁명이 있은 지 2년 뒤, 공화정의 회복을 도모하는 일단의 청년 학생들이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것이 1832년 6월 항쟁이다. 이것을 혁명이 아니라 항쟁, 혹은 폭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부르주와는 물론이고 민중들마저 청년 학생들의 행동을 외면함으로써 그들의 거사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푸르디푸른 청년들의 목숨이 허망하게 꽃같이 떨어져 내렸다. 아무런 결실도 없이…. 바로 이 6월 항쟁이 이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후반부의 배경이다. 흥미롭게도 영화 속에서 혁명을 주도했던 청년 학생들의 좌절은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진보주의자들의 절패감(절망과 패배감)의 데자뷰다.

     

      공화정의 꿈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역사의 진보에 대한 희망도 산산조각 났다. 영화는 엔딩을 바로 이 절망의 시기에 위치시켜 놓았다. 그것은 절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이 절망이 사람들을 Les Miserable(비참한 사람들)이 되게 만든다. 굶주린 조카딸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한 장발장, 백마 탄 왕자와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으나 결국 공장에서 쫓겨나고 창녀로 전락하고 만 판틴, 제 키보다 훨씬 큰 빗자루를 힘겹게 끌며 사기꾼 테나르디에 부부의 여관을 쓸고 닦는 5살짜리 코제트,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 졸라매도 매일 매일 죽음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 부두에서 싸구려 사랑을 나누는 창녀들… 이들은 이미 충분히 비참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더욱 비참한 이유는 그들에게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를 배경으로 설정하고, 가장 비참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절망의 시기에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서다. 해서 대선 패배로 멘붕을 겪던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힐링을 경험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영화가 말하는 희망은 어떤 희망인가? 그것은 멘붕에 빠진 대한민국 진보주의자들에게 힐링을 제공할 만한 희망이 맞는가?


      희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영화 속 One Day More(하루만 지나면)이라는 노래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테마곡을 동시에 부르는 대목이다. 이 부분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내일과 희망 이야기가 들려온다. 장발장은 하루만 지나면 코제트를 데리고 프랑스를 떠날 생각이고,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그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라"를 노래하고, 에포닌은 영영 사랑이 떠날 것 같은 생각에 슬퍼하고, 앙졸라와 청년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고대하고, 자베르는 혁명을 분쇄할 계획을 노래하고, 테나르디에는 죽어 나자빠질 혁명가들의 시체에서 한몫 챙길 것을 희망하다. 내일이 되면 주의 뜻이 밝혀질 테지만 이 수많은 내일과 희망들 중에서 영화가 말하려는 참된 희망은 무엇인가? 영화 말미에서 군중들이 노래하는 소망이란 대체 어떤 소망인가?


      6월 항쟁의 실패 후 16년이 지난 1848년 2월에 다시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이 수립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때 2월 혁명의 승리를 축하하는 바리케이드 위의 군중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비록 더디 갈지라도 역사는 반드시 전진한다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가? 충분히 가능하다. 영화는 '온갖 좌절과 실패 절망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반드시 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소망은 그러한 희망을 넘어선다. 이 소망은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밖에서 역사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초월적 소망이다. 이것은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신적인 소망이다. 이것은 실로 낯설고,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타자적 소망이다. 그것은 바로 신의 은총이 만들어 내는 소망이다. 이 소망은 자베르의 바람도 아니고, 혁명가들의 희망도 아니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말미암는 소망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그 어떠한 소망과도 같지 않다.


      자베르가 별 아래서 부르는 노래, '별들(Stars)'에는 그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희망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상에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악인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정직하고, 양심적이고, 청렴한 경찰이다. 그는 뇌물에 눈이 가려져 판단을 굽게 하는 편파적 경찰도 아니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수사의 강도를 다르게 하는 검찰도 아니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자기주장마저 뒤엎는 일관성 없는 언론인도 아니다. 그는 철저히 진실을 추구하며, 법과 원칙에 따라 한 치의 불편부당함도 없이 공정하게 심판하는 디케의 화신이다. 조금의 관용도 없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응보하는 정의의 사도며, 세계의 수호자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이 땅에 정의와 원칙이 바로 서는 데 일조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이루어 나가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신으로부터 보상을 얻는 것이 그를 지탱하는 희망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수호하려는 법질서가 구체제의 기득권층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법체계라는 점이다.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의 봉사자였다. 그가 지키려는 세계는 기성 질서(status quo)다. 그의 정의는 99%의 민중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며, 그들 모두를 쇠창살 안에 가두는 정의였다. 그가 바라는 소망은 신도 거할 자리가 없는 지독히도 자기 폐쇄적인 바램이었다. 그는 자신이 신의 뜻을 이루는 신의 봉사자라고 굳게 믿었으나 사실 그는 신마저 자신이 수호하는 세계의 봉사자로 이용하고 있었다.


      한편, 앙졸라와 혁명가들은 자베르와는 다른 꿈을 꾸었다. 그들은 기성 질서의 유지가 아니라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세계의 수호자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건설자들이다. 그들의 희망은 바리케이드 너머에 있는 세상, 곧 모든 사람이 왕이 되는 공화국의 실현이었다. 기성 질서를 뒤엎고 새 세계를 이룰 위대한 혁명적 이상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위대한 이상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까지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하지만 혁명가들을 추동하는 힘은 증오와 분노였다. 혁명 전야에 울려 퍼진 민중의 노래는 분노한 민중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하기야 두 주먹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 병든 몸뚱어리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창녀들이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법질서에 복종하라고 강요당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분노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이들은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왕당파와 민중의 부름을 받은 공화파가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며 총구를 겨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기득권층과 소외 계층 간의 이러한 대치를 늘 봐왔다. 법질서를 따르는 법치주의자와 혁명의 이상을 따르는 이상주의자, 기성 질서를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자와 역사의 진보를 믿는 진보주의자의 충돌은 참 익숙한 광경이다. 2012년 대한민국의 18대 대선도 결국 그러한 대결이 아니었던가. 마르크스는 이러한 계급 간 대립과 갈등은 역사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라 했다. 하지만 그 대립과 갈등이 역사를 발전시켜 온 만큼 숱하게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서로의 가슴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온 수많은 나날들…. 영화는 그 많은 대립과 갈등의 역사 속의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보여 주고자 한다. 바리케이드 이편과 저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두에 속할 수 있는 존재를 통해서 말이다. 그는 바로 장발장이다. 장발장은 바리케이드 밖에 있다가 안으로 자원해서 들어간다. 그는 바리케이드를 넘나드는 자다. 그는 혁명군의 편에 서서 총을 든다. 하지만 그가 총을 든 이유는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리우스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는 혁명가 마리우스를 살리지만 동시에 프락치 자베르도 살려 준다. 그는 민중의 아들이고 전과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시장이고, 부르주와고 부유한 기업인이기도 하다. 그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 속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존재는 미스터리다.

      영화가 계속해서 장발장의 정체를 묻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장발장의 정체는 비밀에 붙여져 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코제트도, 마리우스도, 테나디에르도, 자베르도 장발장이 누군지 모른다. 심지어 장발장 자신도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Who am I?" 그는 왕당파와 공화파, 기득권층과 소외 계층, 귀족과 민중, 전과자와 선량한 시민, 혁명가와 근위대, 진보와 보수… 그 어떠한 범주로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건 그가 낯설고, 이해 불가능하고, 기이한 신의 은총을 덧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 은총에 사로잡혀 신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의 은총은 처음 미리엘 주교를 통해 그에게 주어진다. 감옥에서 갓 풀려난 장발장은 먹을 것도 없고 쉴 곳도 없는 가련한 존재였다. 범죄자요, 이방인인 그를 미리엘 주교는 성당 안으로 들이고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는 은인을 배신한다. 그는 밤에 몰래 성당의 은 식기를 훔쳐 달아나다가 체포되고 만다. 미리엘 주교에게 끌려온 장발장, 그에게 내려져야 할 것은 응분의 처벌이다. 법을 어겼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으니 가중 처벌은 더욱 합당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다시 장발장은 감옥으로 처넣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주교는 장발장의 은 식기는 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물'로 주었노라 증언한다. 그뿐만 아니라 주교는 장발장이 놓고 갔다며 가방에 은촛대까지 두 개나 더 넣어 준다. 그리고 그는 풀려난다.


      이때 장발장이 주교로부터 받은 것은 단순히 은수저나 은촛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낯선 그 무엇이었다. 이것은 설명 불가능하며, 이해 불가능한 그 무엇, 바로 신의 은총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신의 은총에 완전히 구속된다. 그의 죽어 버렸던 영혼은 미리엘 주교에 의해 되살아났으며 그가 베푼 은으로 구속되었다. 회심한 그가 자신의 신분증명서를 찢어 버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지상의 법에 규정당하지 않는 해방된 존재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신이 그를 용서했음에도 여전히 그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지상의 법질서는 그 순간 탄핵당한다. 장발장은 더는 지상의 법에 매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를 구속하는 법은 상위의 법인 신의 사랑의 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지상의 모든 법질서로부터 자유케 하고, 그를 수수께끼의 인물로 만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베르는 장발장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자베르는 장발장이 속한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 은총의 질서를 모르고, 장발장을 구속하고 있는 신의 사랑의 법을 알지 못한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모르는 신의 은총의 질서를 자신이 수호하려는 법체계 안에 가두려 한다. 그가 신을 감옥에 가두려는 순간 그는 신에 대한 반역자가 된다. 해서 자베르의 세계는 장발장의 세계와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충돌은 근위대와 혁명군의 충돌과 같은 폭력적 방식이 아니다. 끊임없는 핍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관용과 용서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 대결에서 끝내 사랑이 승리한다. 장발장이 아무 조건 없이, 아무 협상 없이 혁명군의 손에서 자베르를 풀어 줄 때 자베르는 전에 장발장이 그랬던 것처럼 낯선 신의 은총과 정면으로 조우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신의 얼굴을 뵙는다. 하지만 신의 얼굴은 그동안 그가 상상해 오던 신의 얼굴과는 다른 것이었다. 신의 낯설고, 불가해한 은총의 충격이 장발장이라는 존재를 부서뜨렸듯이 이제 그 은총의 파괴력은 자베르의 세계를 붕괴시킨다. 그의 선악 판단, 죄와 의에 대한 구분, 정의, 지켜야 할 법질서, 그의 희망과 소명 의식과 자부심…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 무너지고 만다. 신의 용서와 관용과 사랑의 폭력이 그의 양심을 관통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은총의 순간이요, 구원의 순간이요, 회심의 순간에 자베르는 장발장과 다른 선택을 한다. 그는 자신이 지켜온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가해한 신의 뜻에 자신의 영혼을 의탁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자신이 지켜왔던 세계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베르는 끝내 세계의 수호를 선택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지켜왔던 법에 의해 스스로를 징벌한다. 자살은 그가 지켜왔던 세계를 수호하려는 그의 최후의 경찰 행위였다. 그의 자살은 은총의 가혹함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 속에서 자베르와는 달리 신의 사랑의 법에 순명하는 자들을 보게 된다. 미리엘 주교의 말마따나 그들은 순교자들이다. 왜 순교자들인가? 그건 그들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한 자들이다. 사랑으로 은촛대를 내어준 미리엘 주교와 사랑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남을 위해 내어준 장발장도 순교자들이다. 장발장의 임종의 순간에 미리엘 주교와 함께 장발장의 영혼을 맞으러 온 창녀 판틴, 그녀도 극도의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딸을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한 순교자다. 사기꾼 테나르디에의 딸 에포닌도 사랑의 힘으로 사악한 가정환경과 질투심을 극복하고 마리우스를 위해 숭고한 희생의 피를 흘린 순교자다. 그가 바리케이드의 전투에 뛰어든 것은 사랑의 전사로 뛰어든 것이다.


      순교자들의 증언과 피와 열정으로 신은 당신의 자녀의 영혼을 구원한다. 즉 사랑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코제트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마리우스가 앙졸라와 세상의 색깔을 다르게 보는 장면에서도 이것은 잘 나타난다. 사랑에 빠진 그는 이미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화가 마리우스를 귀족의 자제로 설정한 것은 다소 진부하지만, 이러한 메시지의 전달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결혼은 서로 대립하는 계급 간의 화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사로잡힌 마리우스는 폭력과 대결이 아닌 화해와 평화의 길을 도모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 '희망의 노래'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민중들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는 혁명 전야에서 불렀던 '혁명의 노래'와 닮았다. 곡조도 똑같고 분위기도 똑같고 민중들이 부르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내용은 사뭇 다르다. 혁명의 노래가 성난 민중의 노래라면 희망의 노래는 사랑의 전사의 노래다. 혁명의 노래가 전투를 독려하는 투쟁의 노래라면 희망의 노래는 칼을 쳐서 쟁기로,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노래였다. 혁명의 노래가 모두가 왕이 되는 공화국을 꿈꾸는 노래라면 희망의 노래는 주의 동산에서 누릴 자유와 해방을 노래한다.


      그렇다. 영화가 노래하는 그 소망은 바리케이드 너머의 모두가 염원하는 공화국의 희망을 넘어선다. 만일 '레미제라블'의 소망을 단순한 역사적 진보에 대한 소망으로, 혹은 특정 계급과 특정 정치체제의 승리로 이해한다면 실수를 하는 것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려 한 소망은 그 모든 희망을 넘어서서 역사의 끝에 이루어질 천년왕국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었다. 그것은 그 옛날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계시로 주어졌던 그 마지막 때에 대한 비전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사 2:4)" 주의 나라에 대한 비전 말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레미제라블'이 말하는 제3의 길을 기득권층과 소외 계층 간의 대립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 영화는 그러한 식의 추상화의 길을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희망의 노래가 자베르의 노래가 아니라 민중들이 불렀던 혁명의 노래 위에 덧씌워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정교분리라는 미명하에 기독교 신앙을 추상화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기독교의 복음이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의 화해와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기는 하나, 복음은 분명 부자들이 아닌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소망의 대상에 부자들이 제외되지는 아니할 것이나 소망의 노래는 그 누구보다 희망이 없어 더욱 비참해진 사람들(les miserables)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노래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장발장의 삶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늘 비참한 사람들의 삶 속에 '참여(engagement, 앙가주망)'했다는 사실이다. 참여가 없다면 제3의 길은 말장난일 뿐이다. 장발장의 삶은 평생 참여의 삶이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준비된 사람이었다. 그곳이 공장이든, 매음굴이든, 바리케이드 안이든, 밖이든, 혹은 파리의 하수구든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참여가 개인적 차원이냐, 사회적 차원이냐는 시시껄렁한 논쟁은 불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 어디든,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내민 그 작은 도움의 손길을 보고 희망을 발견할 것이며, 그 작은 희망에서 종말론적 소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소망이 되지 않고서 제3의 길이니, 종말론적 소망이니 하는 건 다 헛소리다.


      '레미제라블'은 크리스천 관객들에게 중대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 절망감에 사로잡혀 멘붕을 경험하고 있는 대한민국 48%에게 '레미제라블'의 소망의 노래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또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스스로 보석 같은 생명을 허망하게 내던지고 있는 비참한 사람들(les miserables)에게 찾아가 소망의 이유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나아가 영화는 기독 신자들에게 장발장이 그랬듯이 대한민국의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찾아가 소망이 되어 주라는 것이다. 지금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소식은 "내일이 오리라"는 희망의 소식이다.

     

       Tomorrow comes!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

댓글 8

  • 김장환엘리야

    2013.01.04 19:57

    2012년 12월 30일 주일 저녁에 가족과 함께 송년모임으로 본 영화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면서
    여전히 제 마음에 진한 울림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좋은 리뷰가 있어 퍼왔습니다.

    영화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장발장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되새기며....
  • Profile

    아그네스

    2013.01.07 09:05

    어제 보고 왔습니다. 감동이 가시질 않네요!
  • 이숙희

    2013.01.07 14:11

    저희도 셀원들 끼리 조조로 보았는데 내내 눈물을 멈출수 없었어요!
  • 박마리아

    2013.01.07 15:13

    저도 내일 꼭 봐야 겠습니다!!
  • 이미진

    2013.01.07 18:06

    목사님의 글에서 영화를 볼때의 감동과 비젼을 ~~~ 장발쟝과 같은 신의 은총의 영역을 꿈꾸며 ... 희망의 노래가 곳곳에 울려퍼져서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에 소망이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 서미애

    2013.01.07 18:39

    저희셀도 2주전에 보았는데 다들 오랜만에 좋은 영화보았다고...다시보고싶네요!^^
  • 박마리아

    2013.01.08 14:39

    Who am I ?
  • Profile

    김바우로

    2013.01.09 10:01

    이 글을 오늘 다시 읽어보니 영화 만큼이나 탁월한 글이군요.
    글쓴 이의 성함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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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8 전미카엘 1229 2013-05-21
2487 김장환 엘리야 1230 2006-12-02
2486 전미카엘 1230 2007-01-12
2485 이병준 1230 2007-01-16
2484 이요한(종) 1230 2007-04-21
2483 김장환 엘리야 1230 2007-10-01
2482 김동화(훌) 1230 2010-03-26
2481 † 양신부 1230 2010-08-19
2480 손진욱 1230 2011-09-14
2479 이병준 1230 2011-10-16
2478 김장환 엘리야 1230 2012-07-19
2477 서미애 1230 2013-01-14
2476 패트릭 1230 2013-01-15
2475 박마리아 1230 2013-04-15
2474 임용우 1231 200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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