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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부인사, 그리고 고민 나눔..
  • 조회 수: 1149, 2010-11-05 04:38:10(2010-11-05)
  • 샬롬 :)안녕하세요 ^^ 아그네스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미국에 온지 한 달하고도 반정도가 지났네요. 이곳에서도 한인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찬양팀, 기독교 세계관 모임, 대학원부 모임 등등 이런 저런 모임들에 함께하면서 마음을 나누고자 노력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느끼는 것은 제자교회가 참 깊이가 있고 훌륭한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유학생 교회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각자의 학문의 영역에서의 깊이는 깊어지는데 반해, 그 삶이 너무 바쁘고 빡빡하고 지치게 만드는 바람에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단계에서 머물러 있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자유 게시판에 글을 남기는것은 참 오랜기간 저에게 있어왔던 고민을 제가 참 많이 의지하고 존경하는 제자교회의 많은 교우님들과 신부님께 털어놓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싶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교회사와 간단한 신학개론 같은 수업들을 들을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한동대학교가 초교파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장로교의 색채가 짙은 한국 기독교 상황에서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 장로교 배경을 가지고 계시고 한분의 감리교 배경을 가지고 계신 목사님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장로교 배경 즉, 칼빈주의 배경을 가진 목사님들의 설교 또는 수업과, 감리교 배경을 가지고 계신 목사님의 설교 또는 수업을 둘 다 들으면서 제 안에 심지어는 "이 두가지 다른 배경의 목사님들께서 말씀하시는것이 같은 기독교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구원에 대한 관점에서가 그랬습니다. 물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 등 매우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같지만, 구원이 "오직 은혜로만"인가 아니면 "인간의 반응"도 구원의 중요한 요소인가를 판단하는 그것이 전혀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좀 더 깊은 배경이해가 필요할까 싶어 아래에 하나의 글을 첨부해 놓았습니다만, 제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라는 이 주장 자체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 "전적 은혜"를 이야기 할때, 예정설도 동반되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반응에 의한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이야기 할때, 그렇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에서는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인데요, 로마서를 비롯한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예정설을 지지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에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저로서는 동의하기가 조금 힘든 부분입니다. 극단적으로 생각했을 때, 세상에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 선교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제 친구(죽을때까지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한"사람이란 말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으로 그 친구를 창조하신 걸까요.

    반면에 알미니안적인 생각에 대해서도 고민이 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림의 믿는 여부임"이라는 문장에 내포된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선언의 온전성이 깨지게 되고, 어쨌거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떠함"이 원인 제공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해석일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이것은 전적 은혜이지만) 결국에 구원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의 어떠함"이 되는것 아닙니까? 이것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100%만족은 시키지 못한다고 생각이 되어서 고민입니다. 또한 이렇게 되면 인간의 행위, 즉 우리가 때로 믿는대로 "행한다"고 하는 것도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 아니냐는 논제가 제기될 수 있겠지요. 어릴때 교회에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어린이는 손들어 보세요."라는 질문에 손을 번쩍 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감히 내가 스스로의 구원 여부를 판단 할 수 있는가? 나는 진정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것과 그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것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지만" 그 "믿는 것"이 제 삶에서 온전히 능력으로 나타나지는 못하는 제 자신을 볼 때 그렇습니다. 온전히 행위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에 대해서 야고보서와 요한1서에서는 매우 회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한 걸까요?

    종교개혁 이후 몇백년, 아니 어쩌면 초대교회, 그리고 어거스틴 이후로 이천년간 계속 이 논쟁이 되어져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인간의 생각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우리에게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혹, 어떤 분은 이 논쟁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너무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냐 라고 물으실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저에게 꽤 중요한 문제인 이유는, 제 삶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맞추어 살아갈 때,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게 만들 중요한 요소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학기 중반쯤 이 이슈가 너무 고민이 되어 심지어 잠을 잘 못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내린 잠정적 결론은 "나의 구원에 있어서는 나의 어떠함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임을 알되,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 앞에서 OPEN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복음 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잠정적으로 정리를 하고 나름 잘 묻어두고 잠잠히 지내고 있었는데, 요즘 요한 1서와 이사야서를 묵상하면서 다시금 이 이슈가 제 머리속을 가득 채워오는군요.. 강명식씨의 "그가 아시니"라는 찬양이 떠오릅니다. "어떤 길로 그분 따르고 섬겨야 할지 잘 알지못해 마음 답답하지만..."

    조금은 답답한 마음에 제 고민거리를 나눕니다. 짐.. 조금 덜어주실거죠? ^^

    한국이 많이 추워졌다고 하던데 갑작스러운 기온의 변화에 건강하시고요..

    곧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샬롬 :)

    =================================
    Part A. 칼빈의 5대강령과 알미니안 5대전조
    - 칼빈의 5대강령
    1.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짐[二重豫定]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3.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함.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4.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 하시지만,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함.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5.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됨,
    (488,아래각주)[궁극적인 견인. Final Persev-erance]


    488. 이상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오늘날 장로교회 신조의 근간을 이루는 것인데, 영어 표현의 머리 글자만을 따서 “튤립”(Tulip)으로 칭하기도 한다.
    ①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③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④불가항력적 은혜(Urresistible Grace), ⑤성도의 견인[보 존](Perseverence of Saints)등이다 라보도 편저.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서울: 성공 문화사, =1981), 217,218.


    - 알미니안의 5개조 전제

    1. 하나님이 예지(豫知)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심.(조건적인 선택. Conditonal Election)

    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림의 믿는 여부임.[보편적 속죄. Universal Atone-ment]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 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Natueao Inability]

    4.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先行)됨이 없이는 이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 도없다. 선행적(先行的)은총 . Prevenie-nt Geace)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役事)하시는 방식에 인간이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저항이 가능한은헤 , Resis-tible Geace]

    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懶怠)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음(487)(아래 각주) [조건적인 견인(堅忍), Condi-tional Perseverance]

    487. A. W. Harrison, The Beginnings of Arminianism(1926), 150, 151.



    Part B. 칼빈주의 예정론의 허실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를 제한 받지 않고 집행하시는 주권 을 가지신 분으로 가르친다,1) 그러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절대 권위를 주장하는 중세 교황 권에 맞서기 위해, 어차피 강조한 하나님의 의지 행사 곧 주권(主權)이 그것과 “관련이 없는 신학 구조에서도 전체 체계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의 위치를 차지하게”2) 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신학적 위상(位相)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이 잘못 적용한 하나님의 주권은 결국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목적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기로 [창조 전에] 예정하”3) 셨다는 타락전 예정설까지 등장시켜, 본의는 아니였을 지라도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해시킨 것은 중대한 신학적인 과오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무조건적인 예정과 선택에 무리하게 결부시킴으로써 범죄로 손상되었을 지라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여, 책임 있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말았다. 웨슬레의 말처럼, 인산의 이성과 의지가 죄로 인하여 비록 어두워지고 약화되어, 스스로 선을 택하고 의를 행하기에는 무력하게 되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선행적(先行的)인 은총(恩寵)이 임할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4)


    -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예정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서 자녀가 되고 후사가 되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청세전에 예정하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엡1:4-2 ; 고전 2:7 ; 롬8: 29; 행4: 27, 28),

    그런데 위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예정하다” 또는 “미리 정하다”라는 표현은 모두 어느 개인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무조건 미리 작정되었다는 개인 예정의 문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타락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이에 대처하여 청조 전에 세워 놓은 신 구원의 계획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는 역사적 예정의 문맥에서 쓰여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위의 네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어느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누구든지 “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예정하셨음이 자명해진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나 택하신 자들의 행사(行事)가 모두 하나님의 “미리 아심”(헬라어Prognosis, 동사는proginosko) 곧 예지(豫知)라는 전제에서 이루어 졌음이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롬8:29, 11:2; 벧전1:2, 20; 행2:23)

    - 모순된 이중 예정과 제한 속죄

    따라서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을 받는 여부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무조건 미리 작정되어 있어 하나님 공의와 자비를 드러내도록 예정되었다는 무조건적인 이중예정은 성경에도 어긋날 뿐더러 하나님의 속성에도 조화되지 않는다(딤전2:4 딛2:11; 벧후3:9; 요3:16).

    칼빈의 예정론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모순에 빠져 버린다.5) 또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기를 원하시는 길을 예증된 대로 당연히 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겔33:11; 벧후 3:9; 약1:13; 요일1:5), 이상의 여러 성경에 입각한 논증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하신 자들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6)는 칼빈주의 제한 속죄론(制限贖罪論)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크게 왜곡하는 중대한 과오이다. 필립샤프도,“제한된 속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推論)한다7)고 지적한 뒤에 “그들은 요한 복음3장 16절 요한 일서 2장2절, 디모데전서2장4절, 베드로후서 3장9절 등의 성경 말씀에 대하여 만족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8)고 진실을 밝혔다. 최근 일부 칼빈주의 학자들이 이상의 두 세 성경 본문을 예정론의 배경에서 설명하려 하지만 모두 무리한 시도임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 인간의 책임과 심판의 당위성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행2:23; 갈6:7-10; 렘6:19; 마12:36,37; 약2:12,13; 계22:12), 행동은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선택은 의지를 행사한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거듭하여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알리시고 순종함으로 생명을 선택하도록 촉구하신 사실은 사람이 가진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바르게 행사하라는 요청인 것이다(신30:19; 수24:15; 사1:16, 20; 계22:17).

    불의한 이 세상에서도 선택에 필요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정신병자나 어린아이 등 선택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법에 의한 책벌을 받지 않는다.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미리 작정해 놓으신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에 대해 어떻게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실 수 있는가?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당위성(當爲性)을 훼손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다.(전12:14; 마25:31-46; 행17:30,31).

    이러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딤전2:4)기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는 은혜를 거역하지 말고, 의지를 바르게 행사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을 행함에 의한 자력 구원(自力救援)을 시도하는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9) 성경에 어긋나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 상실할 수도 있는 구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렸던 사람도 불순종이나 나태(懶怠)함으로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고전 9:27; 갈5:4; 빌2:12; 히10:26-29), 성경에 기록된 많은 실례들은 인간이 불신과 반역, 고의적인 불경(不敬)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성령의 역사가 거절되거나 소멸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10)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될 수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도 어거스틴에게서 물려받은 사상이다.11) 칼빈이 물려받은 바, 선택받은 은혜의 보존 여부에 대한 어거스틴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은총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12)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근거마저도 예정에 돌림으로써, 입증되지 아니한 논증을 다른 논리의 근거로 삼는 순환논법(循環論法)의 모순까지 범하고 있다.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논리에도 어긋난다.


    - 사명과 역할을 위한 선택
    성경에는 언뜻 무조건적인 선택이나 절대적인 예정으로 생각되는 표현이나 실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칼빈의 예정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로마서 9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실례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열거한 바,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과 포기의 실례들처럼 보이는 야곱과 에서, 애굽왕 바로, 이스라엘 민족, 진흙과 토기장이의 실례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강조하는 문맥에 나타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망 받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인 예정의 문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절대적인 구원의 계획을 이르는데 필요한 사람들의 역할과 사명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남보다 의롭거나 순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主權)행사에 의한 것이었다(신7:7, 8; 9:11, 16). 이러한 선택의 목적은 그들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한 바 치명적인 잘못된 선민사상 이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조건 없이 선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도구와 통로로 쓰셔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대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절대적인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함이었다.(창12:2,3; 18:18; 22:18; 행3:25,26; 갈3:8). 곧 “아브라함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얻” 게 하려 하신 것이었다(창22:18; 갈3:16)

    그러나 그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약속된 구원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바로 이 조건을 이루지 못한 채 불신하고 불순종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을 당한 것이다(롬9:30-32; 히4:1-3; 3:19; 신7:9-11).

    이처럼 잘못된 선민 사상과 비 성경 적인 예정에 의한 선택을 믿는 결과가 모두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잘못이 될 수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거울삼아 깨달아야 할 것이다.(롬9:19-24)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불가결(不可缺)한 사명 때문이었지 그들의 구원을 불가결(不可缺)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음이 이미 역사에서 분명해졌다(사49:6; 42:6; 롬9:4-; 히3:7-19; 4:1-11)



    Part C. 알미니안 허실

    알미니안 신학을 주창한 알미니우스도 처음에는 칼빈주의자였지만 Koornhert의 신학을 연구하면서 부터 전통적 칼빈주의가 믿어 오던 몇 가지 신조를 반박하고 다른 견해를 펼치게 되었다.

    필자는 “칼빈주의”와 “칼빈의 신학”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람으로 왜 알미니안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 of Arminianism)이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인가를 분석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분석은 칼빈주의 예정론이 보다 성경에 가까운 이론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다.

    분명히 말하지만 칼빈주의 5대 강령은 그것 자체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의 전체를 대변하지 못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한 정통 신학으로 그 깊이와 폭이 비교적 광범위한 관계로 몇 가지 교리로 간추려 설명 할 수 있는 신학이 아니다. 하지만 알미니안들에 의해 손상된 전통 칼빈주의 사상은 좀 더 세밀하고 정교한 설명이 가미되어진 칼빈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을 어느 정도 대변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알미니안주의는 엄격히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신학적 체계이다. 어떻게 보면 광범위한 그들의 신학적 체계를 5대 강령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큰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알미니안 신학의 오류는 5대 강령으로 요약된 그들의 주장속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알미니안들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갖고 비난하는 “무조건적인 예정론”에 관해서 좀더 사려 깊은 방어를 해야 할 것 같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예정론에 관해서만큼은 모두가 일치된 의견을 수용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오직 개혁주의 노선을 걷는 교회들만 철저한 예정론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은 모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믿고 따르는 교회들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Of God's Eternal Decree)에 나오는 예정론 교리는 개혁주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신앙 이념으로 고백하는 하나의 신조이다.6)

    1) God from all eternality did, by the most wise and holy counsel of His own will, freely and unchangeably ordain whatsoever comes to pass: yet so, as thereby neither is God the author of sin, nor is violence offered to the will of the creatures, nor is the liberty or contingency of second causes taken away, but rather established.

    2) Although God knows whatsoever may or can come to pass upon all supposed conditions, yet hath he not decreed anything because he foresaw it as future, or as that which would come to pass upon such conditions.

    3) By the decree of God, for the manifestation of His glory, some men and angels are predestined unto everlasting life, and others foreordained to everlasting death.

    4) These angels and men, thus predestinated and foreordained, are particularly and unchangeably designed; and their numbers is so certain and definite, that it cannot be either increased or diminished.

    5) Those of mankind that are predestinated unto life, God,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d was laid, according to his eternal and immutable purpose, and the secret counsel and good pleasure of His will, hath chosen in Christ unto everlasting glory, out of his mere free grace and love, without any foresight of faith or good works, or perseverance in either of them, or anything in the creature, as conditions, or causes moving him thereunto; and all to the praise of his glorious grace.

      위의 고백서는 1645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의해 고안되었지만 이것은 이미 초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신조이며, 개혁주의 교회들이 수용해 왔고, 알미니안들이 의문을 제기한 교리이다. 알미니안들의 반박을 잠재우고 예정론의 입지를 더욱 강화 시키는 내용은 특히 위의 3장 첫 번째 항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을 요약하면, “온 우주만물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가 얼마나 광대하고 세밀한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포와 계획안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역사 가운데 그 어떤 작은일이나 큰일도 영원전 부터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을 쫓아 지나갈 것이라”.

      사실 하나님의 영원전 계획과 선포에 대한 이유 자체가 알미니안들과의 충돌의 원인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선포가 실존생물, 즉 인간들의 미래 운명과 연결되어져 한 부류는 영원한 삶을 살고 다른 한 부류는 영원한 죽음으로 택정 되었다는 사실이 충돌의 원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일반적 선포에 대한 교리는 일반적인 사건뿐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불변의 원칙을 가지시고 다가 올 어떤일에 대해 미리 규정 지으셨다면,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을 받는다면, 마땅히 하나님은 이런 사건들을 당신의 의지와 불변의 원칙으로 규정 지으신 것이며 또 그 밖의 다른 사건들도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 때문에 알미니안들이 다른 모든일은 하나님의 선포와 계획속에 있는 일이지만 인간의 운명에 관해서 만큼 그렇지 않다고 부인한다면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모순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삶과 죽음으로 영원전 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주권은 특정한 숫자의 죄인들만 구원코자 하시는 일에 있어서 결단코 선택된 죄인들의 미래의 선행이나 믿음을 예지하시고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결정 되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불변적인 선포를 통해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일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신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따라 그들의 죄의 원인으로 멸망의 길을 가도록 규정지어진 것이다.

    바로 이런 교리를 알미니안들이 부인하는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절대로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예정해 놓지 않으셨다고 한다. 다만 하나님은 당신의 선포를 통해 그들을 믿는자들로 이해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알미니안의 기본적인 신앙으로서 개혁주의 신앙의 규범을 저해한다. 매우 중요하고도 진지한 예정론의 교리가 너무도 쉽게 알미니안들의 손에 의해 손상되고 있다. 알미니안들은 매우 기본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를 무시한다. 이와같은 부인은 진리의 바탕위에 서있는 개혁주의 교리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알미니안들의 입장은 단순히 예정론 교리를 무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들의 5대 조항의 첫 번째 교리는 다음과 같다. “That God, by an eternal unchangeable purpose in Jesus Christ His S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hath determined out of the fallen, sinful race of men, to save in Christ, for Christ's sake, those who, through the grace of Holy Ghost, shall believe on this his Son Jesus, and shall persevere in this faith and obedience of faith, through his grace, even to the end."7)

    얼핏보면 이 교리는 칼빈주의 규범과 별 다를바가 없어 보인다. 이 교리는 영원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고 끝까지 그들을 인도하시기로 결정하셨음을 보여준다. 누가 보아도 손색없는 기독교적 신앙 고백이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한 불변의 선포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거룩함으로 견디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로 결심하셨다. 하지만 이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거기에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불변의 선포를 좇아 이미 선택되어 구원받은 부류와 구원받지 못한 부류를 구별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선포를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들에게 최후의 날을 선포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인내를 갖도록 도우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미니안들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전자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입은 대상들에게 구원의 약속이 보장 되지만, 후자와 같은 경우는 인간의 믿음과 인내의 결과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인간에 대한 선택이지만 후자는 인간의 노력과 자질에 대한 선택이다.

    이렇게 되면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선택이 믿음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지로 아신 인간의 믿음이 선택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은 결과적으로 인간안에 잠재해 있는 선과 능력에 의존된 것이지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뜻에 의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칼빈주의 교리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이런 형태의 알미니안 교리는 오히려 칼빈주의와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고 만다.

    칼빈주의에서 가르치는 선택설은 구원을 받고 영생을 가져다 주는 선택으로 은혜와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포를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선택으로 인간을 구원하셨기에 또한 인간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주권적인 것이며, 이 절대 주권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이 택하신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나아 오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와 역사를 아끼지 않으신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을 때 우리를 창세전 부터 택하시고 영원 끝까지 견인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자. 이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진리이며 칼빈주의가 믿는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가만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총을 입은 백성들의 마음과 귀가 열리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7).


    Part D. 참고자료 – 구원론 비교(Naver 지식 in 자료)

    장로교회는 대부분 칼빈의 교리를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장로교도 분파마다 혹은 목회자마다 차이가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하고 있는 구원관과 예정설을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칼빈의 구원관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의지하게 됨으로 인간이 구원에 있어서 기여할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했던 것처럼 은총은 어느정도 강제적으로 다가 오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을 결정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칼빈은 여기에서 그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에 대하여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대체로 칼빈주의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 측면에서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을 강조하게 되고 이에 따라 '이중 예정설'이 나옵니다. 측 은총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또 '폭력적'(어거스틴은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으로 다가오므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자를 예정해 놓으셨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칼빈의 이중예정설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이 '이중예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께로 100% 나오는 은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신학을 따르고 있으나, 구원관에 있어서 오늘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웨슬리의 사상을 해석하는 데에서 나름의 차이를 보이고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칼빈처럼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의지로 그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그 은총의 혜택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칼빈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졌으며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사상도 사람의 행함이 구원에 어떤 공로가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을 사람이 자유의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오늘날 감리교 신학자들은 이가 마치 인간의 행함이 구원에 어떠한 공로가 있는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는 경향이 생겼고, '성화'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부류가 생겼지요. 성결교단은 이 '성화'를 '성결'과 구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결교 신학은 배우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감리교 신학보다는 인간을 덜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예정에 관하여서는 좀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목회자나 선교사들과 같은 사역자들에 관해여서만은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라는 '부분 예정'을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알미니우스 논쟁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칼빈주의자로 시작했지만, 신실할 크리스천이었던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 5대강령은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약간은 폭력적인 '견인적 은총' 사상과 '이중예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것이 크게 논쟁으로 번져서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을 발효하면서 알미니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칼빈주의 5대강령에 반대하였고 여기에 알미니우스는 말하지 않았던 한가지를 더 추가했는데 그것이 바로 '견인적 은총'에 반대되는 '구원의 상실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알미니우스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의 추종자들 즉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은 칼빈주의 5대강령에 각 항목에 반대되는 강령을 만들어 내면서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사상에 동화되었고, 오늘날 스스로 알미니우스 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사상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알미니우스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감리교 신학자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구원 받은 이후의 행실에 따라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라고 단언하기 때문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대로라면 구원받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으며, 모두가 구원을 잃었다가 얻었다가를 반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 사상을 일부 수용했던 웨슬리도 구원을 상실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으며 그의 주옥과 같은 여러 설교는 오히려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가 발견한 웨슬리의 문제점은 그의 종말론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그 외에는 그는 칼빈보다도 훨씬 훌륭한 목회자며 설교가였습니다. 웨슬리는 신학자가 아니었지요.

    저의 구원관은 웨슬리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저는 침례교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일방적인 은총은 인간이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고 성경대로 믿습니다. 행함은 결코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예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창세전 부터 예정하셨다는 것을 성경대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멸망받기로 예정한 영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러한 은총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하기로 예정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누가 그 분의 은총을 거절할 것인지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들 '예지예정'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절대로 하나님은 한 영혼도 멸망하기로 예정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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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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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구

    2010.11.05 12:23

    아그네스~
    제자교회 게시판 역사상 가장 긴 글을 끝까지 잘 읽었다.
    학문을 하는 젊은이 다운... 깊이가 있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시절에 그런 고민을 해 보지 못한 나를 뒤돌아 볼 때 아쉽기도 하고, 한세대를 건넌 딸같은 네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참 대견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다.
    .
    여러 인용문들의 흐름을 볼 때 아그네스 안에 확실한 구원론이 이미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들고... 또한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
    어쩌면 더 단순해 질 필요도 있는 것 같고...
    .
    .
    건강하고 종종 소식 보내길...
  • 박마리아

    2010.11.05 19:14

    샬롬~~
    아그네스, 엄만 네 글만 읽고 인용글은 안보고 쭈욱 내려왔는데... 베도로아씨글을 보니 대단한 정성이시라 나도 다시 꼭 읽으마!
    .
    교계의 끊이지 않는 논란의 여지를 우리 은하가 잘 소화한 것 같고, 엄마 생각도 너와 같단다.
    다만,우리가 혹시라도 인본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 조차 주님께 내어 드리고 기도하자
  • 김장환 엘리야

    2010.11.05 20:31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룩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가 놀라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내 삶이기를 갈망하며...

    세상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함께 누리며 가장 인간다운 예수의 삶을 살아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내가 증인으로 살기를...

    하여 오늘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성령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역사 앞에 섭니다.
  • 전진건

    2010.11.06 10:38

    예수님이 100퍼센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100 인간이신 것이 우리의 이성으로 볼때에는 상반된 이론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신비이며 진리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듯이 예정론과 의지론도 100퍼센트 하나님의 섭리와 100센트 우리의 결정 (비록 우리가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된 것임)이 만나는 구원의 신비로 생각할 수 있죠. 사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예정론보다 훨씬 난위도가 높죠.

    예정론에 있어서 오해되는 부분은 예정론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누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되어 있다는 것으로 오해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리 알았다' 는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녀 삼으시겠다고 미리 선언한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시기로 이미 결정하셨다는 개념으로 보면 맞습니다.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없지만 '결혼한 부부가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이미 태아가 생기기도 전에 그 아이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될 정도로 사랑하기로 미리 결정했다' 라는 개념으로 비유를 들 수 있겠죠... 간결하게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박진연

    2010.11.13 18:05

    항상 '은하씨'라고 불러서 신명이 저하고 같은지 몰랐네요~ㅎㅎ
    부모님을 통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 종종 듣습니다.
    이렇게 글을 통해 만나니 더 반갑네요~
    파이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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