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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란 무엇인가?(펴옴)
  • 조회 수: 1190, 2010-08-10 14:21:14(2010-08-10)


  •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절)


    석가탄신일은 말 그대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입니다.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인 석가는 기원전 6세기 경 인도 네팔 지방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 성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위와 풍요를 누리지만, 29세에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번민하다가 처자를 버리고 출가합니다.

      그는 6년 동안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인 수행에 전념하며 해결 방안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결국 극단적인 고행이나 쾌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석가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가르침을 전파하게 되는데

    그 결과 불교라는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럼 불교란 무엇일까요?  불교(佛敎)는 글자 그대로 '부처의 가르침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또한 '부처가 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석가가 설법한 당시의 불교를 불교에서는 '원시불교'

    라고 합니다. 이 원시불교에서 소승불교(小乘佛敎)가 나왔고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나왔습니다. 소승불교는 스리랑카, 태국, 버마, 인도차아나 등에 두루 퍼져 있고,

    대승불교는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그러면 소승불교는 무엇이고 대승불교는 무엇일까요?

      먼저 소승불교는 대승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불교로 출가주의(出家主義) 불교

    입니다.  출가는 가정생활, 성 생활, 경제 행위 등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초기 경정인 '스타니파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원해서도 안 되며 친구를 원해서도 안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교제를 하면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면 고통이 생긴다.

    애정에서 재앙이 나온다는 이 점을 명심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결국 이 말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면 애정과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열반에 이를 수 없으므로

    출가하라. 그래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소승불교는 '출가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소승불교 뿐 아니라 석가가 설법한 원시 불교도 출가주의 불교입니다.

    그런데 석가가 입멸한 후 수백 년이 지난 기원(紀元) 무렵이 되자 소승불교의 출가주의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출가하지 않고 구원 얻을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불교를 전개해 경전을 만들고 대승불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가(在家) 신자도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가 가정생활을 버리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침인데 반해 대승불교는 "가정생활을 하는 것에 관계없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소승불교 측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본래 소승불교의 명칭은 대승불교에서 붙인 것입니다. 소승불교의 출가주의는 오로지 자기 혼자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출가주의를 후세에 생긴 대승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독선이라고 비난했고 가르침이 작다는 뜻으로 '소승'

    이라고 불렀습니다. 때문에 소승불교에서는 자신들의 불교를 '소승'이라고 부르지 않고 상좌부(上座部) 불교라 부릅니다. 상좌부 불교도들은 대승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대승불교가 비불설(非佛說)이라고 공격합니다. 즉 대승불교는 석가가 입적한 후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나온 신흥종교로서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비판입니다.

      이들의 이런 비판은 억지가 아닙니다. 실제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에는 석가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가의 사상은 원래 무신론으로

    신 또는 신적 존재자에 관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대일여래나 아미타불 등과 같은 신적 존재자가 나옵니다.

      또, 대승불교에서는 정토(淨土) 혹은 불국토(佛國土)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정토(불국토)는 기독교로 말하면 천국입니다. 그런데 정토사상은 원래 석가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즉 원시 불교에는 없습니다.

      또한, 소승불교는 시종일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공(空), 즉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라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끝없이 변화하는 무상의 세계 속에서 상주(常住)하는 것, 즉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대승 불교는 영원한 것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일파인 정토종에 이르면 원래의 원시 불교에는 없었던 ‘죄’의 개념이 거론됩니다. 일본의 승려 신란은 인간의 죄 문제를 강하게 인식했으며, 사찰 중에도 ‘참회멸죄사’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승불교에는 말법(末法) 사상이라고 하는 역사관 및 미륵이라는 미래의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석가가 입멸(사망)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현대는 말법시대로, 석가의 가르침이 실행되고 있지 않은 무척 혼란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미륵이라는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해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미래의 어느 날 이 세상에 구세주가 나타나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원래 원시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앞에서 소개한 대로 대승불교에는 대일여래나 아미타불과 같은 신적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상, 정토사상, 상주(常主)사상, 죄 사상, 미륵보살 사상 등 원래 원시 불교에는 없었던 사상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의 사상과 유사합니다.

      실제로 불교사의 권위자인 A. E. 골든은 미륵의 어원을 조사한 결과, “인도어로 미륵은

    ‘마이트레야’이고, 중국에서는 ‘미르어’,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으로서 이것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다.” 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히브리어의 메시아가 인도에서는

    마이트레야, 중국에서는 미르어, 한국에서는 미륵이 된 것입니다.

      또한 아미타불에 대해서도 불교사의 권위자인 알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미타불의 교리는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중국 불교는 카슈밀이나 네팔에서 전례된 것으로, 아미타불 사상은 당시 그 지방에 영향을 주었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후 4장 18절)고 밝힘으로서 끝없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상주(常主)를 강조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성경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조상이라 불리는 용수(주후 150년~250년경)는 금강보살로부터 대일경(大日經)이라는 경전을 받을 때 금강보살로부터 관정(灌頂)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머리에 물을 뿌리는 의식으로 그 이전의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입니다. 용수는 분명히 기독교의 세례를 모방해 그러한 의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원래 불교에는 없었던 멸죄 사상을 칭송하는 ‘참회멸죄사’가 생겨나는데 이 또한 기독교의 영향입니다.

      그리고, 12세기에 이르러 대승불교에서는 남무아미타불을 외우면 누구든지 정토에서 태어날 뿐 아니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무(南無)는 ‘귀의한다’ 또는 ‘믿는다’는 뜻으로 남무아미타불 이란 ‘아미타불을 믿는다.’ 또는 ‘아미타불에 귀의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불교에서 신적 존재자인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그 신적 존재자에게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보이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사도행전 2장 21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기독교 신앙이 여러 경로를 통해 불교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결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순수불교가 아니라 혼합종교입니다. 이 때문에 대승불교에 대해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대승비불론’(大乘非佛論)이 학자들 사이에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승불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꼭 믿으실 분은 이것을 알고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서론은 이쯤하고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땅에는 5만개의 불교 사찰과 15만여 명의 승려들, 50여만 명의 무당들, 그리고 2,000여만 명의 불교 신자들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 불교는 일신 해탈의 득도 위주에서 탈피하여 불교 대중화 포교 방법으로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을 벗어나 도심에 절을 지어서 적극적인 도심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옥상에 올라 가보면 교회 십자가 네온사인뿐 아니라 불교의 ‘卍’자 표시도 간간이 눈에 뜨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불교는 솔직히 할머니들의 기복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학문의 불교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전도 방법보다는 논리적인 교리 비교 전도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도하려면 불교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불교의 허와 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부처


      부처란 말의 원래 의미는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부처는 석가를 말하는 것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한 사람의 인간을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초인간이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며,

    또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감임을 자처했습니다.  

      일예로 ‘박카리’라는 제자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소원으로 석가모니 스승에게 예배드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석가모니는 “박카리야,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 하겠다는 것이냐?”라고 말하면서 예배를 거부했습니다.

      또, 언젠가 석가모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석가모니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석가모니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천사입니까?” 석가모니는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체념 어린 질문을 받았을 때 석가모니는

       조용히 “나는 깨달은 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석가모니는 신이 아닙니다. 신은 전지전능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전능하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옛날 인도의 구시라성의 시다림에서 한 과부가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석가가 그 곳을 지나다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과부는 병중에 있는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에 석가는 한번도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씩 얻어다가 죽을 끊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돌아온 과부는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그런 집이 없어 빈손으로 왔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여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석가는 죽음 앞에 무력했고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11절~17절).

      또한, 석가모니는 결코 전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석가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석가는 전지하지 못한 까닭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쿠시나가라로 가는 중에 ‘춘다’라는 신도가 대접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 죽었습니다.

    춘다가 돼지 요리에 독버섯을 넣었던 것입니다.

    석가는 이 요리를 먹고 설사병에 걸려서 죽어갔습니다.

      석가가 힘없이 설사병에 걸려 죽어갈 때 아난다라는 제자가 슬퍼하면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석가는 냉정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난다여, 스스로를 주(洲)로 하며 스스로 의소(依所)로 하여

    다른 이를 의소로 하지 말며 머물라.”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나를 의지할 생각일랑 말고 스스로를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하긴 독버섯을 먹고 설사를 줄줄 하면서 죽어가는 신세에 어떻게 자기를 의지하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석가는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았으며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어이없게도 이렇게 죽은 석가모니를 신격화해서 그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의 개조인 석가를 ‘구원 실현의 부처’라 하여 영원 전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석가가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석가는 영원 전에 이미 부처가 되었다.

    그럼 왜 세상에 태어나서 수행했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영원한 그리스도 사상의 불교 판입니다.

    실제로 인도의 유명한 종교학자 아만드 샤 박사는 “그리스도의 사도인 도마의 복음에 대항해

    석가를 성인에서 구세주로 승격시킨 것이 대승불교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석가가 영원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하여 석가를 신격화하는 것은 석가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며 기독교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기독교를 모방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부처에 관해서는 이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시간관계상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철스님의 초팔 법어에 나타난 부처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 대신 결론에 가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성철 큰 스님의 법어에서 참 희한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1986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들,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도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시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여기서 성철은 재소자들과, 호스티스들이 부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이듬해인 1987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보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은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 같이 부처와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

      이와 같이 성철은 심지어 사탄이 곧 부처요 부처와 사탄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이런 것이 부처라면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겠습니까?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제가 신학교 4학년 때 울산에 있는 모기도원에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장로교 목회자 한 분이 강사실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자신은 기도 중 입신을 하여 지옥엘 여섯 번 갔다가 왔는데 그때 그 곳에서 부처를 보았다 고합니다. 부처가 그 곳에서 형벌을 받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를 한다면 불교신자들이 얼마나 펄펄 뛰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자제하고 가급적이면 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초팔 법어를 읽고는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989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그는 급기야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에 독존 무비한 부처님의 처소는 험악하고도 무서운 저 지옥,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모든 중생들의 그 고통을 대신 받고, 그들을 안락한 곳으로 모시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중생계가 한이 없으니 부처님의 지옥생활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중생계가 다 할 때까지…….”

      이와 같이 그는 부처가 지옥에 있으며 부처의 지옥생활은 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1993년 11월, 그는 다음과 같은 열반 송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니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지라…….”

      여러분, 대한민국 불교 신자 중에 성철보다 불심이 강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부처가 사탄이라고 했으며, 부처는 지옥에 있다고 했으며,

    자신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불교란 지옥에 가 있는 부처를

    믿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허탄한 종교입니다.


댓글 2

  • 김영수(엘리야)

    2010.08.10 16:52

    간단 명료하게 불교를 잘 알수 있게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도여행때 대구교회 조영준 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좀 더 이해하고
    불교의 허구성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 Profile

    ♬♪♫강인구

    2010.08.10 20:09

    요셉~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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