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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온 글 - 마지막 수업
  • 며칠 전, 소포 하나가 배달됐다. 거기엔 CD 한 장이 들어 있었고, CD 속엔 25년 세월과 그것을 관통하는 가르침 하나가 담겨 있었다.

    지난여름, 윤석원 선생님은 정년을 마쳤다.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을 했고, 그 자리엔 제자들과 학부모 그리고 마흔 줄의 옛 제자 몇몇이 참석했다. 선생님은 고별 강연에서 ‘감수성’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사람 노릇 제대로 하려면, 그리고 진하게 살려면 남의 아픔과 슬픔을 당사자만큼 느껴야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아프리카 어린이가 텅 빈 배식소 앞 땅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포동포동해야 될 아이의 마디 사이가 텅 비어 마디란 마디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어린이의 사진 앞에서 “못 본 척하고 얼른 지나쳐야 하나, 아니면 왜 저런지 알아보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찾아봐야 하나”. 머뭇거리던 당신의 시선을 돌이키면서 선생님은 공감의 능력이 둔해진 자신을 탓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집안의 호두나무 가지를 자른 뒤 “느른한 수액이 그 상처 부위에서 마구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한 달 동안 계속 수액이 흐르자 그것이 피로 느껴져 “호두나무야, 정말 미안해”라고 “그 밑을 오갈 때마다 빌어야 했”던 이였다.

    1989년 여름 서울. 전교조 교사들의 농성장을 전경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안에 선생님이 있었다. 대학생이던 친구와 나는 우여곡절 끝에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졸업 뒤 몇 년 동안 찾아뵙지 못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초췌함에도 빛나는 의기를 숨기지 못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던 순간, 선생님은 “이 녀석들”이라고 우리를 불렀던 것 같다. 그 낯익은 말투.


    “사회심리학자들은 양심이 사라진 사회가 양심이 없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합니다. 돈과 권력을 미끼로 작동되는 경쟁 사회,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 따지는 사회, 승자가 싹쓸이하는 사회, 돈이라는 만능 신을 숭배하는 사회, 정의가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사회, 협력은 잊고 경쟁만을 부르짖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남의 고통을 느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느낄 수 없는, 이런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고교 시절, 고전문학 시간은 늘 지루했다. 선생님은 느릿느릿한 말투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날의 단어들과 문장들을 풀어주셨다. 시간은 졸음 속에 풀어지고, 창밖엔 뾰로통해진 여자친구의 표정이 아스라했다.


    “그래서 성인들도 한결같이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감정이입의 방법으로 가르쳤습니다. …제자가 인(仁)이 무어냐고 묻자 공자가 ‘남이 싫어하는 짓을 않는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이러면 내가 싫으니까 남도 싫어할 거야라는, 내 맘으로 미루어 남의 맘을 읽어내는 능력, 감수성이 없다면 인(仁)도 알거나 실천할 수 없을 겁니다.”

    고별 강연장에선 스승을 떠나보내며 훌쩍거리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나도 그 시절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오히려 얼마나 기뻤을까, 생각해본다. 그 엄혹한 시절, 불혹을 넘긴 선생님이 해직을 감내하며 참교육 운동에 참여한 것은 우리 졸업생들에게도 뜻밖의 소식이었다. 아마도 국어 시간이나 고전문학 시간에 못다 한 말씀이 있었던 것이리라 우리는 생각했다. 그 이심전심의 가르침을 이제야 또렷한 문장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 임금은 절반밖에 못 받고 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내 심정이 어떨까요. 내가 가난한 베트남에서 시집왔다고 돈 몇 푼 주면서 맘대로 부려먹으려고 한다면 내 심정이 어떨까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어서 모를 뿐이지 우리 곁에는 소리 없이 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덜어주기는커녕 공감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수업 며칠 뒤 옛 제자들이 조촐한 축하연을 마련했다. 근간에 허리를 다친 선생님이 한 제자의 부축을 받고 당도했다. 낯선 장면에 눈물이 날 뻔했다. 첫 수업 날, 엉뚱한 ‘도전’을 감행하던 친구를 불러내 매를 드시던 젊은 선생님의 모습이 또렷하다. 우리는 새로 생긴 고등학교의 겁 없는 1기 입학생이었고, 선생님은 정확히 지금 우리의 나이였다.


    축하연 자리에서 옛 제자들이 전달한 감사패에는 신영복 교수의 글이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선생님은 고향 마을로 돌아가 헌집을 고쳐 나무를 가꾸며 살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사모님은 표정이 살짝 새침해졌다. 좌중에 웃음이 퍼졌다. 한 친구가 선생님의 고별 강연과 축하연 모습을 CD에 담아 남기기로 했다.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댓글 1

  • 김장환 엘리야

    2008.10.20 00:01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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