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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보디아 기독교 선교에 대하여 - 노진태선교사 (레니타 타용, 퍼온글)

  • 1923년 최초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도착한 이래 힘겹게 복음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이번 아시아 선교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레니타 타용 목사(캄보디아 감리교 성경학교 학장)와의 인터뷰를 통해 캄보디아 기독교 현황에 대해 자세히 들어 보았다.


    * 불교왕국 캄보디아, 역사적 배경

    캄보디아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기원후 100년경 중국 관리가 기록해 놓은 것으로, 당시 지금의 캄보디아 땅은 "후난(Funan)"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 졌고, 중국 영토의 일부였다.

    대대로 불교왕국이었던 캄보디아에 외국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즈음이었다. 포루투칼 상인들과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에 이어 f본인 가톨릭 신자들과 인도네시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네덜란드계 유라시아인들이 캄보디아에 들어왔다.

    캄보디아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1920년, 미국인 재프레이(R.A.Jaffray)박사가 “캄보디아”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미국교회에 미전도 종족으로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23년 C&MA(Christian & Missionaries Alliance)의 하몬드(Arther Hammond)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도착하였고 그해 말에 엘리슨이 또한 캄보디아에 도착하였다.

    최초로 7명(캄보디아인 2명, 베트남인 5명)의 회심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1924년에 하몬드 선교사가 크메르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알리손(Paul Alison) 선교사가 5명의 캄보디아 신자들을 모집하여 최초로 성경학교를 시작하였다.

    후에 이 학교는 신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2년 시소왓 모니봉 왕이 캄보디아인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는 등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 최초의 성경과 초기 선교역사

    1924년에 하몬드 선교사가 크메르어 신약성경 번역을 시작하여 1929년, 최초로 2,000권의 크메르어 신약성경이 발간, 배포되었다.

    1940년, 신구약 성경 전체가 크메르어로 완전히 번역되었지만 발간되지 못하다가 1953년, 영국성서공회의 도움으로 크메르어 성경전서가 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경번역이 완성되던 1953년에 캄보디아는 오랜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54년에 시하누크왕은 새롭게 번역된 성경을 선물 받은 자리에서 기독교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캄보디아에 종교적인 자유를 선언하였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1954년 이후 10년간 기독교교회는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나갔다.

    점점 더 많은 젊은 캄보디아 남성과 여성들이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발견하고 정식 교육과 훈련을 받아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캄보디아엔 진정으로 애국적인 크메르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신자여야 한다는 통념이 여전히 강했지만, 교회는 캄보디아 각처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갔다.

    이즈음에 캄보디아 기독교 선교역사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는데 캄보디아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회들이 캄보디아 교회가 향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교회로 성장해야 한다는 새로운 선교 방향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미 수많은 선교사들이 선교회로부터 최소한의 생활비만 지원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선교회의 결정이 나오자, 많은 선교사 또는 기독교 조직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가족부양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더 나은 임금조건을 주는 일을 찾아 나섰다.

    당시 이런 상황의 변화는 막 성장하기 시작한 캄보디아 기독교 교회에 큰 어려움을 주었고 1958년 같은 경우, 단 한 사람의 젊은이도 따그마우 성경학교에 등록하지 않을 정도로 어려움이 심각했다.

    1959년에도 불과 4명의 학생이 이 학교에 등록했고, 1960년이 되어서도 6명 정도가 등록했을 뿐이었다.


    * 전쟁과 기독교 박해

    미국인들이 베트남 지역에서 전쟁  중이던 1965년에 캄보디아의 시하누크 왕은 북 베트남, 곧 베트콩과 연맹을 맺고, 베트콩이 캄보디아에 군대를 주둔하고 중국을 통해 무기와 전쟁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미국은 이런 시하누크의 행동에 보복을 가하고자 캄보디아 영토를 폭격하기에 이른다.

    이런 미국의 행동에 대해 캄보디아도 보복을 감행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을 축출하고, 기독교인을 조직적으로 핍박하였고 크메르인 목사들은 감옥에 갇히고 교회가 핍박받고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 론놀 장군이 시하누크 왕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

    론놀이 정권을 잡은 지 5년이 지나 미국인들이 다시 캄보디아 땅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때부터 5년 동안 선교사들은 본격적으로 구호와 지역 개발 사업에 주력했다.

    이런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어, 1972년과 1975년 시기는 캄보디아 역사상 기독교 교회가 가장 급성장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75년 4월에 크메르루즈군이 캄보디아 전역을 휩쓸면서 모든 선교사들은 캄보디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크메르루즈군은 기독교인과 목회자에 대해 잔인하고 조직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이 전쟁기간 중 캄보디아 전 목회자 중 단 세 명만이 살아남을 정도로 학살은 철저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난민촌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하여 난민촌내에서 캄보디아 기독교회는 계속 자라나게 되었다. 바로 이 난민촌에서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고통과 아픔 속에서 오히려 캄보디아의 교회가 성장하고 많은 지도자들이 키워졌다.


    * 전쟁이후

    전쟁이후 캄보디아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시하누크 왕이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UN과 기독교 후원 단체들이 캄보디아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1993년 캄보디아 헌법을 통해 종교적 자유가 선포되었다. 정치적 불안과 낮은 임금, 무능하고 부패한 공무원들이 양산되는 혼돈의 시기였다. 캄보디아는 총 인구 중 52%가 18세 미만의 인구로 이들은 서구화 물결에 영향을 받아 영화와 TV의 영향을 통해 급속히 서구화되어 가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전통과 문화적 가치를 상실해 가고 있다.


    * 기독교 선교사들의 당면한 과제

    기나긴 불교 전통과 외국의 원조를 받는 문화에 익숙해진, 많은 가난한 캄보디아인들이 외국 선교사나 단체에 쉽게 의존하고, 수동적인 수혜자로만 머물려고 하는 경향이 심각해지고 있다. 캄보디아엔 지금 너무도 많은 어려움과 동시에 기회가 있다.

    선교적 관점에서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함께 돌보아야 하는 사명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 일은 길고도 계속 되는 수고가 요구되는 사명이다. 전도와 전도책자를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일회적인 전도방법이 아주 인기 있는 선교방법인 반면, 오랜 시간에 걸쳐 제자로 양육하는 제자양육은 종종 외면되는 선교 사업이다. 제대로 양육되지 못한 어린 신자들은 개종 후 몇 개월 만에 교회를 떠나버리고 만다. 몇몇 선교사들은 더 많은 신자들을 만들려는 욕심에 쌀, 중고의류 심지어 우물까지 지역주민들에게 선물로 제공하며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한다. 물론 이런 선심이 하루아침에 교회를 부흥시키고 전도 폭발을 이루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결신자가 아닌 그저 얻어먹고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만은 양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정부의 지나친 개방정책으로 온갖 종류의 종파와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캄보디아는 그야말로 이단을 포함한 모든 ‘선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수많은 단기 선교팀들은 문화적 차이나 캄보디아의 고질적인 문제에 무지한 상태로 잠시 왔다 가기 때문에 돈만 낭비하고 가고 마는 식이 다반사이다. 싱가포르에서 온 젊은 대학생들 팀은 고아원을 방문해 돕겠다고 하며, 고아들의 머리를 잘라 주었는데 자신의 머리조차 잘라본 적 없는 미숙한 솜씨로 인해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캄보디아 정부가 개방정책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 활동은 전혀 핍박을 받고 있지 않지만,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진지한 생각 없이 지역 문화에 대해 철저히 무지한 상태에서 나름의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형편이다.

    전도지에는 불교도들이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저주하는 글을 아무렇지 않게 써넣은 일은 국교가 불교라는 점을 고안할 대 캄보디아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캄보디아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어언 80년이 되어간다.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캄보디아는 기독교의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레니타 타용 목사를 통해 들어 본 캄보디아의 현황을 생각할 때 이제 모든 크리스천과 교회의 노력을 모아 미래의 캄보디아의 지도자들, 제자들을 양성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음을 알 수 이ㅆ다.

    캄보디아 교회는 더 이상 자신들의 사업과 이름만을 알리고 싶어 하는 잘못된 동기에 사로잡혀 돈만 써대는 외국 선교기관이나 단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캄보디아는 진정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존중하며 하나가 되어, 크메르 형제, 자매와 함께 계속하여 살아나갈 선교사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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