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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7월 11일]루가 10:24-37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배우는 사랑의 원리
  • 청지기
    조회 수: 1763, 2010-07-13 23:20:01(2010-07-13)
  •   주일마다 비가 옵니다. 뜨거운 태양과 땅을 적시는 단비는 가을의 결실을 약속합니다. 이 시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과 성령의 단비가 부어져 우리가 모두 열매 맺는 제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기쁜청년회가 어제부터 수련회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마 이 예배가 수련회 끝 순서이고 오후에는 전도여행 준비모임에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여행은 현재 57명이 참가 신청했습니다. 오늘 오후 1시 30분에 3층 성당에서 참가자 첫 모임을 갖게 됩니다. 아직 결정 못하신 분도 그 자리에 오시면 됩니다. 분명한 것은 편안한 여행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회복되는 은혜를 부리는 평화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참여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릴레이 금식기도과 재정 후원으로 함께 하시면서 보내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야기 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던진 질문 -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으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을 얻으려면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안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 3:15,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가 관건입니다.
      이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는 성경을 학문적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 읽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면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성경을 가르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너는 어떻게 성경을 읽느냐?’하시는 예수님의 이 질문을 들으면서, 성경을 읽지 않고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딤후 3:16-17,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해 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신자서의 바른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 인생의 지침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신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자로서 성경을 어느 정도 읽는 것이 합당할까요?
      아마도 나이 수만큼 읽으면 될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약 55시간이면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1년에 55시간을 내지 못해서 성경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하고 어떻게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먼저 성령의 조명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딤후 3:16에서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님이 저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읽으려면 반드시 성령님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원래 읽는 책이 아니라 듣는 책입니다.
      
      오늘 율법학자가 대답한 말씀은 신명기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4-6,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원문은 ‘쉐마, 이스라엘’ ‘들어라. 이스라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경을 읽을 때 눈으로 보고 머
    리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귀에 들릴 정도로 소리를 내어 자기가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정작 읽어주시는 했지만 본인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
    입니다. 듣는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
    다. 신자에게 가장 큰 평화는 말씀대로 살아갈 때 임하게 됩니다. 주님의
    평화를 풍성하게 누리는 삶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마지막에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잠시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율법학자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제가 읽은 책에 본문의 내용을 아주 잘 정리한 글이 있어 그 내용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제목 -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배우는 사랑의 원리’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고 행동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행동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모습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라.
      사랑이 시작되는 곳은 우리 눈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친절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볼 줄 아는 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볼 줄 아는 눈. 사랑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아픔을 보지 못할까요?
      이유는 우리가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한다면 먼저 속도를 늦추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급한 일로 쫓길 때에는 누군가에게 집중을 할 시간이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 옆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고 싶다면 여러분의 삶의 속도를 늦춰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다른 이들의 고통을 공감하라.
      선한 사마라아인이 두 번째로 보인 행동은 강도 당한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필요를 볼 뿐 아니라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에서는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라고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길에 사마리아인의 눈에 강도 당한 자가 보였고, 그의 마음에 연민이 생긴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서는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슬픔을 나눠야 합니다. 서로의 짐을 나눠 지고 그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눈높이를 그들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4절은 “가까이 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는 무릎을 굽혔을 것이고, 그에게 난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훈련을 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을 자라게 할 것입니다.

    3. 그 순간 필요한 도움을 주라.
      선한 사마리아인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것들을 가지고, 당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습니다. 기다리거나, 지체하면 안됩니다. ‘내일 하겠다’는 말은 금물입니다. 사랑은 내일로 미룬다면, 결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가 ‘가까이 가서 보고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다’고 말합니다.
      포도주는 소독의 효과와 마취 효과가 있었고 기름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가진 것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은 모순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이 가진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고..’라고 말합니다.
      무슨 수로 상처를 싸맸을까요?
      반창고도 없던 시절입니다. 의사라서 상비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강도당한 자는 옷도 다 빼앗긴 상태였을 텐데 말입니다. 방법은 단 하나. 자신의 옷을 찢어서 싸매어 준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 옷을 찢어서 운도 없는 가난한 희생자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는 문제를 보는 순간 자신이 가진 것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랑이 때로는 불편함을 가져옵니다.
      때로는 하루 일정을 모두 망쳐 버릴 수도 있고, 엉뚱한 일에 연루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는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강도들이 아직도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겁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은 덫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할 것이 두려울 수도 있었습니다. 민족 간에 늘 존재해왔던 감정들이 가져온 두려움이었을 겁니다. 사랑의 실천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두려움을 이겨낼 때 가능해 집니다.

    4. 대가를 지불하라.
      사랑에는 비용이 듭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여러분의 시간, 물질,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선한 사마라이아인은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줍니다. 그가 내준 데나리온 둘은 오늘날의 두 달치 월급 정도가 되는 금액이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두 달치 되는 금액을 주막 주인에게 내어주며 그를 부탁하는 장면에서 그가 말합니다.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사마리아인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생면부지의 남을 돌보기 위해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는 그를 발견한 즉시 응급처치를 해주고 또 그를 주막으로 데려가기 위해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옵니다. 그를 태우느라 정작 본인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20마일은 되는 그 길을 걸어야 했을 겁니다.
      
      주막에 와서도 그의 선행은 이어집니다. 그를 돌보고 밤새 간병하고는 심지어 돈까지 지불하고 떠납니다. 떠나는 순간에도 추가비용은 자신에게 청구하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베푼 사마리아인에게 돌아오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사람에게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여러분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없는데 왜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이유가 필요 없겠죠. 그런데 사실 하느님은 선행을 베푸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인생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사랑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교회 여러분에게 질문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제는 아닐 것입니다. 레위인도 아닙니다. 강도만한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구원받은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주위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강도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이 고통 가운데 우리 주변에 있는 이유는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주님의 손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진짜 믿음, 진짜 신자입니다.

      강도만난 이웃을 내가 그 믿음을 지닌 사람인지를 확증해 주는 구원의 통로입니다. 보고도 그냥 지나쳐간 사람들, 사제나 레위인은 비록 성경을 많이 알고 종교적인 삶을 열심히 살았겠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수많은 교인들이 다 구원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보고 지나치지 않고 다가가 그들의 필요를 당장 채워주고 대가를 지불하는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분명 입술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동영상 하나를 재방송합니다.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
      장권사님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갔습니다. 그 필요를 채웠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가득담은 가장 큰 축복,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사랑의 원리를 기장교회 전도여행에 적용하여 말씀드립니다.

      저와 신자회장님이 우리 교회를 대표해서 기장을 가서 보았습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세워졌건만 무력하게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 그곳에서 주님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건너와서 도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당장 필요를 채우고자 100만원을 송금했습니다. 옥탑방에 전기를 끌고 장판을 까는 비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갈 것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알리고 도배공사 노동을 하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전도여행의 경비로 1000만원이 필요합니다.
      엄청난 대가 지불입니다.
      고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금같은 휴가의 시간을 봉헌합니다. 재정을 봉헌합니다. 가지 전 금식으로 기도합니다. 모여 준비하며 기도합니다.

      이 행사를 추진하는 저의 마음에는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마음은 다릅니다.
      ‘내가 너희을 기뻐하노라!’.
      ‘먼저 너희에게 회복의 은혜를 부어줄 것이다.“

      2010년 여름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말씀을 살아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누릴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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