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10년 3월 14일]루가 15:11~32 아버지의 사랑을 내 맘에
  • 청지기
    조회 수: 1427, 2010-03-15 12:11:46(2010-03-15)
  •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

      지난 주 타계하신 법정스님의 말씀입니다. 스님은 무소유라는 책을 쓰셨고 글을 삶으로 살아내시며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셨습니다. 기복주의와 물신주의로 무력해진 현대 교회 크리스챤들에게 주는 도전이 크기만 합니다.

      참 큰 사람이셨습니다. 숭고한 죽음 앞에 애도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소유를 설파하시고 살아내신 법정 스님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글로써 접하는 그분은 참 거룩하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분의 영혼이라면 하느님이 영원한 생명으로 받아주시지 않을까?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

      사순 3주일까지 드리는 ‘성체 후 기도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두 가지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거룩한 희생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경건한 삶의 모본으로 오셨습니다.
      법정 스님의 일상과 내면을 알 길이 없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생각과 말과 행실로 범한 죄와 허물이 있을 것이고 또 자주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을 것입니다.

      고후 5:21,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비록 적은 죄와 허물일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In Him) 그 죄의 결과인 영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이 법정 스님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한 성경이 말하는 최종 판단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그분의 삶 앞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앞서 나와 있는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와 연결되는 이야기로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느님께 가장 큰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7절,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9절,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고자 하느님은 예수님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태신자 작정카드를 주보사이에 넣어 드렸습니다.
      기도 하시면서 전도대상자를 품으셨는지요?
      우리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고후 5:18-19,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18절,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
      19절,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

      전에 보았던 ‘타이타닉 전도 동영상’을 다시 보겠습니다.
      -----
      우리 모두 전도대상자를 마음에 품고 3월 22일부터 드리는 사순절 특별 감사성찬예배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최고의 기쁨이 되는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한 절 한 절 읽어가면서 하느님을 떠난 인생들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마음, 한 영혼의 구원을 기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담게 되기를 바랍니다.

      11-12절 상반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제 몫’ - 사람들은 독립을 원합니다.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죄란 피조물인 인간의 자기 독립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독립과 이기주의가 죄의 뿌리입니다.

      12절 하,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격적 관계란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막무가내 식으로 강제하지 않는 것이죠.

      본문의 아버지는 사람들의 결정과 판단을 존중하는 하느님의 이미지입니다. 타 종교는 인과응보에 기초한 율법과 행위의 종교라면 기독교 신앙은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유대인들의 재산법에 의하면, 재산 상속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수는 있어도 재산 처분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었기에 둘째 아들의 요구는 아버지에게 참으로 당혹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의 분깃을 떼어주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아버지는 재산만이 아닌 아들까지 잃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것으로 그리고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24절, 32절)
      24절,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32절,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하였다.”

      13절,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먼 고장으로 가 버립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대로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사는 죄인의 삶입니다. 그 결과는?
      14절,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알거지-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의 상태를 표현해 줍니다.
      뿌리가 뽑힌 꽃이 잠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는 있으나 이내 시들어 말라버리는 법입니다. 공허하고 허무하고 내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생들에게는 그 영혼에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구멍이 있다.’

      15절,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떵떵거리며 돈을 뿌려대던 허세는 온데간데없이 주린 배를 채우고자 더부살이하는 절박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부잣집 아들이 머슴살이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것도 돼지치기로.
      돼지치기는 가장 비참한 신분에 처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재산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유인의 신분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것은  
      
      16절,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축의 먹이로나 쓰이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입에 넣으려고 몸부림칩니다. 쥐엄 열매는 대개 동물의 사료로 쓰이는 콩깍지입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돼지만도 못한 인생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삶으로 떨어진 둘째 아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하느님을 떠난 인생은 존귀한 사람의 모습을 갖지 못합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17절,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아버지를 떠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직면한 둘째 아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번쩍 듭니다.
      죽는 자리에 떨어진 둘째 아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또한 어떤 입장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집 생각이 났습니다.

      하느님은 떠난 사람들은 그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각성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인생들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죄인들에게 제 정신이 들게 되는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전에 있던 교회에서 무당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시누이가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대상자를 품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그 영혼이 죽을 수밖에는 이웃들의 심령에 이런 자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전 4:4,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누이의 기도로 무당에게 정신이 들었듯이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면 우리의 전도대상자의 심령 안에 어둠의 악신이 떠나가고 십자가의 복음이 들려지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18-19절,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생각한 둘째 아들의 결론입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에는 먼저 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양심이 화인 맞아 육체의 정욕을 따라 즐기던 때에는 전혀 죄에 대한 찔림이 없었는데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 이르자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 되어 살아왔던 죄 된 삶에 대한 돌이킴입니다.

      죄의 자각에는 죄책감이 따릅니다.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으니, 품꾼으로라도...’ 죄책감은 자기의 존재감을 낮춰버립니다. 아들이 아닌 품꾼이라는 노예 의식이 있게 됩니다.
      

      20절 상,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 둘째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개역)
      이것이 회개의 모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주님께 나오는 것 말입니다.

      여기서 ‘일어난다’는 말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말합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회개임을 알게 됩니다.

      돌이키지 않는 것은 곧 죽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살기위해서는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20절 하,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집과의 거리는 꽤나 떨어져 잇는 시점인데 아버지가 먼저 둘째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옵니다.

      독립하겠다고 자기 몫을 챙겨서 저 멀리 떠난 둘째 아들을 늘 그리워하며 눈을 들어 아들이 떠난 길을 바라보고 계셨던 아버지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동구 밖으로 나그네의 모습이 보이고 좀 더 주의하여 살펴보니 집을 나간 자신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점점 가까워지며 모습이 좀 더 분명해지는데 행색이 말이 아니고 완전히 거지꼴입니다.

       이 같은 둘째 아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가슴이 타들어가고.... 이내 단숨에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과연 나 같이 못된 놈을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며 대우하실까?’   종으로라도 써달라고 매달려야지 마음을 다 잡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달려오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비참한 몰골을 다가와 보시면 무엇이라 하실까?’ 고개를 들 수 없이 우두 꺼니 서 있는데, 두 손을 벌려 꽉 껴안으시며 입을 맞추시는 아버지...... 이렇게 까지 아버지에게 환영을 받을 줄이야!

      회개하는 자에게 오는 예상 밖의 환대입니다.
      추악한 죄인을 그대로 용납하시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시나요?

      21절,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어쩔 줄을 모르고 너무 송구스러워 외칩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 아닌 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은혜인데...

      22-24절,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누더기 옷이 벗겨지고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하고 좋은 옷이 입혀지고 손에는 아버지의 대리인임을 표시하는 좋은 가락지가 끼워지고 발에는 신이 신겨지고 게다가 살진 송아지를 잡으며 온 동네잔치가 벌어집니다.

      ‘좋은 옷’이란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큰 영예를 의미했습니다. 왕이 신하를 포상할 때 옷을 하사했습니다. 아들의 죄 탕감과 함께 아들로서의 관계회복을 나타낸 것입니다.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반지를 준 것은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을 말합니다.

      ‘신’ - 당시 종은 신을 신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스스로를 종으로라도 대접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신을 신겨 줌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살진 송아지’- 유대인들은 귀한 분이 올 때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잔치가 벌여졌다.’ - 잔치에 동네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통해 용서를 공포하고 아들의 신분을 재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들 안에 있는 죄책감을 벗겨주고 회복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며 존귀한 하느님의 아들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우리는 모둔 하느님의 존귀한 아들 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도하고자 기도하고 섬기는 영혼들도 마침내 아버지께 돌아와 우리와 같은 형제 자매가 되어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시간 우리 모두도 둘째 아들처럼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 그 품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부인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며 내 멋대로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사 53: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이라는 책에서 맥스 루카이도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동안 그의 양손을 어떻게 사용하셨을지 궁금하게 여깁니다.
      ‘기쁨에 넘친 아버지가 완전히 망가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달려나가는 이야기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셨을까?’
      루카이도는 말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중에,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의 양팔을 쭉 뻗으셨다. 아픔이 느껴질 만큼 양 팔을 활짝 벌리셨다. 그리고 그 팔들은 결코 닫혀지지 않고 그 손들은 결고 닫혀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그것들이 못에 박혀 활짝 펴지게 하셨다. 그것들은 아직까지도 그렇다.”
      
      이 시간에도 주님은 여러분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일어나 주님께로 나오면, 여러분의 실패, 실수, 그 어떠한 죄와 허물이라도 상관치 않고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기뻐하시며 온 우주를 향해 외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나의 딸이다.”
      
      이제 여러분 모두 주님의 품 안에 안겨 용서와 위로를 얻고 능력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97 청지기 1710 2012-02-10
696 청지기 1710 2012-03-02
695 청지기 1712 2011-03-14
694 김장환엘리야 1712 2014-03-16
693 청지기 1715 2009-03-02
692 청지기 1719 2019-07-07
691 청지기 1721 2022-08-17
690 청지기 1723 2012-06-17
689 청지기 1724 2018-07-06
688 청지기 1725 2010-02-17
687 청지기 1726 2009-03-16
686 청지기 1730 2018-12-02
685 청지기 1732 2022-12-19
684 김장환엘리야 1735 2014-06-29
683 청지기 1735 2018-03-14
682 청지기 1735 2018-09-05
681 김장환엘리야 1736 2014-11-09
680 청지기 1738 2020-09-22
679 청지기 1741 2010-08-16
678 청지기 1746 2018-11-18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