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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3월 26일] 요한 3:14-21무엇을 쳐다 보고 계십니까?
  • 청지기
    조회 수: 2699, 2006-03-27 09:00:12(2006-03-27)
  • 인생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인생살이가 힘이 들면 참지 못하고 이내 불평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여정을 보면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너 자유인이 되었고 많은 기적들을 체험했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진이 있음에도 가나안을 향한 광야의 여정이 힘이 들기에 이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5,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야훼는 여전히 마음이 완고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시어 백성들이 죽어 갔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인생이 독인 것입니다.

    이 때 중보자 모세는 하느님 앞에 엎드려 불뱀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시며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구리뱀을 쳐다보면 사람은 누구든지 다 살리라!”

    구리뱀에 물린 자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시에도 나름대로 뱀이나 벌레에 물릴 때 사용하는 민간요법이나 의료 행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내린 명령은 그들을 납득시키기에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독이 온 몸으로 펴져 내려가 죽음 직전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둥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한 모세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미 사람들은 모세를 불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사 그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모세의 입으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더 더욱 신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그대로 구리를 녹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이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살것입니다. 야훼의 말씀이오.”

    모세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구리뱀을 바라 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온 몸에 퍼진 독으로 인해 그대로 죽어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사건에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뱀의 독일까요?

    아닙니다. 각 개인 무엇을 선택했느냐 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각 사람의 의지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벗어난 것일지라도 하느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각 개인의 의지적인 선택이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교사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나누시면서 불샘과 구리뱀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시며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둥에 달인 구리뱀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실 십자가를 미리 예고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갈라디아 3:13)이 있듯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고 도무지 신뢰할 구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구리뱀이 쳐다보는 이스라엘백성이 살아난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영원히 산다고, 하지만 구리뱀을 쳐다보지 않은 자가 죽었듯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요한 3:16)

    영원한 생명과 멸망, 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멸망의 실체는 죽음입니다. 인간에게 본질적인 죽음이란 하느님과의 단절된 삶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꽃꽂이한 꽃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뿌리가 없어 생명이 죽어가는 것처럼, 하느님 없는 인생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그 육체의 생명이 끝나면 그의 영혼은 하느님이 없는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어둠 가운데 살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멸망의 실체는 지옥의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느님과 동행하며 죽음 뒤에는 하늘나라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주님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이 이러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다면 가만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물며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고자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느님과 단절된 채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아버지의 의 사랑이 죄 없는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광야에 높이 들인 구리뱀을 쳐다본 자가 살아나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그의 영이 살아나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게 되며 또 그의 이름을 힘입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기서도 멸망과 영원한 생명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각 개인이 내리는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내가 바라 볼 것이냐 부정할 것이냐, 믿을 것이냐 부인할 것이냐?’

    생명의 길을 선택함에는 어떠한 이유와 경로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부인하고 오직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무엇을 쳐다보고 계십니까?

    이 시간 잠시 눈을 감아 봅시다. 지금은 의지적인 선택의 시간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하시는 분은 이 시간 믿음의 표시로 오른 손을 높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손을 높이 들으신 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이제 손을 내리시고 눈을 뜨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이 계속 됩니다.

    예수님을 쳐다본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나라 천국 백성이 되는 내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의 삶에서도 결정적인 문제가 됩니다.

    제가 보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고난이나 어려움을 닥쳤을 때 주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어렵게 하고 있는 환경과 처지를 바라봅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과 처지를 바라보기에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절망하게 되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사람에게서 원수 마귀가 가장 기뻐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는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고 힘든 현재의 상태에 붙들어 놓고 전진하지 못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이 우리 삶에 역사하실 줄 믿고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조금씩 바꿔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상황을 주실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길 원하시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시고 훈련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다른 사람의 삶에 역사하시는 과정의 일부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고 계시며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큰 목적을 위해 오늘 특정한 상황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지 않고 산 정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누리며 살 때만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경향이 많습니다.

    현재 삶이 주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닙니까? 배우자나 자녀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까? 일터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건 아니야. 하느님, 너무 하시는 것 아니에요?’라는 말이 터져 나옵니까?

    이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추슬러야 합니다.
    잠언 20:24, “사람이 하는 일은 야훼께 달렸으니 사람이 어찌 스스로 이루랴.”

    이 땅의 삶의 문제도 무엇을 쳐다보느냐는 의지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환경과 처지가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쳐다보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환경과 처지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면 살아계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래까지 포함해서 모든 일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인생에 큰 그림을 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있는 곳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바로 그곳입니다.
    하느님을 의심하지 말고 전적으로 믿으십시오.
    하느님은 만물을 주관하고 계시며 언제나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당신은 지금 무엇을 쳐다보고 계십니까?
    잠시 눈을 감고 우리의 시선을 환경과 처지에서 하느님으로 조정합시다.
    “태산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말라. 태산을 만드신 하느님을 바라보라.”
    다시 눈을 뜨십시오. 이제 마지막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가족 친구 친척 이웃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래도 우리 신자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얻고 오늘의 삶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알지 못하는 내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주일 오후에 비전네트웍크 기도모임 대신에 아웃리치 노방전도행사를 가졌습니다. 30여명이 함께 나아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지역을 축복하시고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고자 전도의 의무를 다하는 우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명심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전도지나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주님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는 신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모습입니다.

    만약 그들이 보기에 우리 크리스챤들의 삶이 정말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과 다르다면, 크리스챤들이 자신들이 전하는 성경말씀을 따라 사는 것으로 보여 진다면, 그들은 신자들에게서 주님을 보는 것이며 성경말씀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들에게 성경이나 전도지는 단지 인쇄물 이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들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태신자 봉헌카드를 작성해 오시기 요청했습니다. 오늘 봉헌 시간에 제출하시면 됩니다. 혹 작성해 오지 못하셨다면 다음 주일에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신자 봉헌카드를 제출하면 그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새벽기도와 중보기도 시간에 지속적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묶고 있는 어둠의 악신들이 떠나가도록 영적전쟁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앞서 말씀드린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의 수고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삶이 동반되어야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나를 통해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선택해 가야 합니다.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는 삶으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애쓰는 삶으로 말입니다.

    불신자들이 쳐다보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의 언행심사가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다시 눈을 감아 봅시다.
    불신자들이 당신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회개하며 성령님이 도우심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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