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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2월 12일] 왕하 5:1-14, 마르코 1:45 옷을 벗으라!
  • 청지기
    조회 수: 2718, 2006-02-13 12:25:30(2006-02-13)
  • 이스라엘 선교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기도해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이번 수요에배시간에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 땅에서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는 분도 계시겠지만, 참 호강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신자로 살아간다고 그 누구도 우리를 배척하지도 소외시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회는 우리 신자들이 참된 제자로서 살아가기를 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소외되고 배척받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게 됩니다.

    선교여행 기간 중에 이스라엘 교회를 4곳 방문했습니다. 이스라엘 기독교 신자들을 메시아닉 쥬우라고 부르는데, 그들과 만나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성령하느님을 갈망하는 그들의 뜨거운 심령들을 보았습니다.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성령님의 위로와 능력을 받지 않고는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들기에 성령충만을 갈망하는 신자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악꼬라는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는 가이라는 젊은 목사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처절하게 기도하며 애통해 하는 모습! 뜨겁게 부등켜안고 눈물흘리던 모습!

    기독교를 배척하는 사회속에서 자신의 힘과 능으로는 신자로서 삶을 살아갈 수 없기에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저런 간절함과 처절함이 있는가?
    우리는 너무나 적당히 안주하며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까?
    메시아닉 쥬우 교회들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주님의 재림의 길을 준비하고자 했던 이번 선교여행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그 여행에 참가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잠시 이스라엘 선교여행 중에 있었던 간증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은미 간증)

    치유하고 회복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교회력으로 어제가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었는데, 오늘 성경말씀에도 나병환자가 치유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눈 후에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치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출애굽의 여정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쓴물을 마셨을 때 하느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시고 쓴물을 먹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해주시며 하느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나는 야훼, 너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 야훼 라파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병든자를 치유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야훼 라파 하느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간구들 들으시며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오늘 구약성경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장군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인 Syria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에 나라를 위기에서 구원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도 그를 무시하지 않고 존경하였으며 군대장관으로서 높은 지위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1절에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존귀는 그가 하느님을 알든 모르든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라고 말합니다.
    존귀한 자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며 존귀케 하신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합당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당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당신의 존귀함이 하느님께로 온 것임을 믿습니까?

    그렇게 존귀한 자로 보이는 나아만도 실상은 문둥병자였습니다. 화려한 장군복장 안에는 피부가 문둥병으로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행복하고 부족할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황폐한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좋은 집,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늘 마음이 편치 않고 불화가 있는 집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공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가수들, 탤런트들, 세상적으로 부러워할만한 사람들, 의사, 변호사,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공허한 삶, 썩어가는 삶을 보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입니다. 이것들은 다 없어지는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존귀하고 화려해 보이는 세상의 옷 뒤로 감추인 문둥병 때문에 사람들과 온전한 사랑도 교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그런 나아만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전쟁 포로로 잡아온 어린 계집종의 말을 통해 이스라엘에 그의 나병을 치료해 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고하고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을 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아만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 보고 치유와 회복을 위한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첫 번째 나아만의 오류는 자기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황금보화를 들고 나아갑니다.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군사령관의 위엄을 갖춘채 이스라엘로 찾아옵니다. 본문에 기록된 것을 오늘날 화폐로 환산해 보면 약 10억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질병은 돈으로나 그의 지위가 주는 위엄으로는 해결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돈이면 안되는 게 어디있냐고 합니다. 돈이 뭔가 할 것처럼, 권세가 뭔가를 해결해 줄 것처럼, 인맥이 뭔가를 해결해 줄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공로로 하느님께 은혜를 입으려고 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를 낮추시어 진정한 축복을 받게 하시는 하느님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주십니다.

    이럴 때 세상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나아만과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 나아만의 오류가 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고 시종 게하지를 보내 요단강에 7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해줍니다.

    이 때 나아만이 이렇게 말합니다. 11절 12절 말씀입니다.
    “나아만은 화가 치밀어 발길을 돌리면서 말하였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나병을 고쳐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아바나 강과 발바르 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크게 노하여 발길을 옮겼다.”

    이렇게 나아만은 자기 병의 치료에 대한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까지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11절).

    자기 생각이 문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과 생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해결의 방법이 바로 앞에 있는데 내 생각과 계획에 하찮아 보입니다.

    출애굽의 여정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무렸을 때 하느님은 처방으로 구리뱀을 나무에 매달아 그것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무슨 처방이 그렇습니까? 어쩌구니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으면 불뱀의 독으로 죽는 것입니다. 쳐다보면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처방에 분노하고 시리아로 돌아갔다면 나아만은 나병환자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맞지않다고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내 생각대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치유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첫째 믿음입니다.
    마르코복음 1장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믿음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둘째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세미하게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어린 계집종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계집종의 말을 듣고 당대 강대국 시리아의 군사령관이 약소국의 하느님의 사람을 찾아갑니다. 자기 휘하의 부하의 말을 듣고 결국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하라는대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었습니다. 7번 씻었습니다. 6번만 씻어도 되는거 아니야 생각할 수 있겠지만, 7번 씻으라고 해쓰면 7번 씻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유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온천지에 가득차 있습니다. 온 우주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내 생각을 내려놓고 듣고자만 한다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프란시스 성인은 자연을 통해서 주님과 대화했습니다.

    성경말씀은 물론이고 주변사람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아무리 작은 음성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었을 때 순종하면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옷을 벗어야 합니다.
    믿음은 온전히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것이기에 자기의 상처를 가리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치유의 강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옷처럼 자기를 위장하던 것들, 병거나 무기처럼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을 버리고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하는 것은 치유와 회복의 전적으로 주님께서 사랑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마르코 1장 41-42,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주님의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낫게 해주시고자하는 사랑의 마음이 치유를 가져오는 능력의 샘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측은지심으로 주님 앞에 나온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치유하고 회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도 버리고, 내 생각도 버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사랑의 손길로 임하시어 치유하시고 회복해 주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주님이 채찍 맞으시고 상처를 입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것임을 믿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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