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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3년 7월 6일] 마르코 6:6하-13, 고후 12:6-10 파송받는 제자의 조건-김진세 부제
  • 청지기
    조회 수: 4363, 2003-07-09 13:27:00(2003-07-09)
  • 지난주 우리교회는 성전축복식을 하느님의 은혜가운데 성대히 치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부임과 더불어, 또한 이사도 지난주간에 한때문인지 저와 제 아내 다비다는 지금도 사실은 좀 얼떨떨 합니다.

    또 새롭게 이사한 집주위로는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선 열차가 앞쪽으로, 뒤편으로는 국철기지가 있어서 늘 전철이 다니고, 그 위쪽엔 역시 국토를 가로지르는 1번국도가 있고, 때로 하늘에선 전투기가 가끔 에어쇼를 하듯하고...아뭏튼 어마어마 하게 분주하고 어리둥절한 것 같은게 요즘 요즘 저희들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하느님의 어김없는 계획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 부부는 매 시각 깨닫고 있으며,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또한 교우님들의 많은 관심과 기도에도 감사인사 드립니다.

    지난주본문을 통해 우리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존귀히 여기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도 이 세상을 구하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이었습니다. 하느님 영광과 성령으로 충만한 세상을 디자인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독생자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사역을 계승할 제자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등장하는 열두 제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교회의 모토가 뭔지 생각나시는분 손들어 보세요..네 바로 "제자삼아 양육하는 교회"입니다. 참으로 존귀한 목표를 우리 교회는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교회는 이제 다음달이면 제주도로 전도여행단을 파송하게 됩니다. 24명이 파송되지만 사실은 우리 모든 교우가 참여하는 전교회적인 사역이며 우리 동수원교회의 영적성장에 아주 중요한 분수령이 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장면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주 합당한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사실 본문은 전도여행을 앞두고 있는 우리교회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뿐만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신앙훈련의 성숙한 지경에 이르러 핵심적인 제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해야 선택되고 쓰임받는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말씀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교회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사도행전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는 기능을 합니다.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던 초대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와 비교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죄로인해 괴로워하는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이 이르며,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 치유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며 교회로 나아옵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위해 때로 사람들은 교회로 나오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이들은 그저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인생의 무게를 그분을 의지해 덜고자 교회로 나아오기도 합니다. 실로 다양한 이유와 목적으로 사람들은 교회로 나아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처럼 주님의 명령을 받은 열두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파송되어 나가기도 하고,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결정에 따라 바울로와 바르나바가안티오키아로 파송되기도 합니다.  많은 해외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기두 하고, 봉사자, 의료인, 전문가들을 교회는 때때로 선교적 필요에 따라 곳곳에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의 부류에는 그 어떤 제한 없으며 사실 그 문은 넓게 열려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파송하는, 즉 주님이 파송하는 제자들의 자격과 조건은 매우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렇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던 제자들을 맘내키는대로 , 즉흥적으로 세상에 파견하신 것이 아님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지난주 본문이나 2주전 본문, 즉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는 장면 모두가 사실은 오늘 본문과 연결이 돼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전도여행 가운데, 돈도,먹을 것도, 여벌의 옷도 허락지 않으십니다. 물론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 따른건 몰라도 먹을 것, 입을 것은 좀 넉넉히 허락해주셔야 일이 돼요, 주님 너무 하십니다..저 같으면 그랬을 거예요. 지난주에 산 오리털점퍼가 있는데 주님 그거 이번여행을 대비해 산거니까 좀 가져갈께요, 저는 기관지염이 심해서 이번 여행에 소염진통제는 좀 챙겨갈께요, 혹시 잘데가 없을까봐 최신형 침낭을 인터넷주문으로 하나 샀는데.... 주님 다른건 다 버려도 그건만을 가져 갈께요...전도여행중 빨레하기 어려우니까 일회용 속옷좀 넉넉히 챙길께요....
    다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아니라 하십니다. 가져가지마.. 왜 그러셨을까요..

    두주전 복음본문에는 호수를 건너시다 풍랑만나셨을때, 물에 빠져 죽을까봐 아우성치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의 믿음없을 질책하셨습니다. 늘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수잘믿네 해도 일터지면, 다급해지면 주님이 어떤분인지 깡그리 잊어버리고 세상사람들과 전혀 구분이 않되게 불평하고 불안해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것이 우리네 연약한 신앙인의 특징 아니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배가 요동치는 그 장면에서 예수님주무셨으까요? 저는 예수님 자는척했을 것 같아요. 한눈 지긋이 감고 한눈은 실눈을 뜨고 제자들이 어떻하나 보셨을 것 같애요..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아무일도 우리는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극한의 상황, 최악의 상황가운데서도 주님만을 의지하는 훈련이 된 사람들만이 그러한 믿음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비록 우리가 커다란 시험과 어려움에 직면한다 할찌라도 우리 자신을 연단시키고자 하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를 맡길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평온하고 만족한 삶만을 우리는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평온함 가운데 평온함을 누리는 세상적인 평온함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해도 나 두렵지 않네 했던 성현의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을때 우리는 세상속으로 파송될수 있습니다.

    모리야산에 귀한 독생자 이삭을 바치러가던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그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그에게 없었던들, 그 용맹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미 청년이 되어서 육적인 힘으로 아버지 아브라함을 압도할수도 있던 이삭, 그래서 아버지 이게 무슨짓이에요 하며 아브라함의 손목쯤 비틀수 있었던 이삭, 그러나 자신을 향해 짓쳐오던 무지막지한 칼날을 그대로 받아내고자 했던 그 절대 순종의 스토리는 아버지 안에 흐르고 있는 흠없으신 최고로 순결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한 영혼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호수를 건너와서 군대마귀 들린 사람을 구원하시고는 다시 호수건너편으로 되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그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보았습니다. 한 생명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다른것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효율성을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루가복음15장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대목입니다. 평소 늘 아버지께 순종하고 성실했던 큰아들에게는 인색하면서도 , 모든 것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방탕한 삶을 살다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 그 죄인된 아들을 차별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다면 저나 여러분이나 아마 이 자리에 단 한분도 없었을거라 확언합니다.거기 나오는 잃었던 아들은 우리 자신들이며, 그 아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늘 이름을 흐느끼며 부르던 아버지는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거하는 자들에게 우리주님은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믿지 않는 이들을 봐도 맘에 애통함이 없습니다. 그저 인생관이나 종교관 다르기때문이겠지, 내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해 하고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짠맛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그 어떤이를 회심시킬수는 없을지라도, 그 영혼을 주님께 의뢰하며 구원해달라는 기도는 바칠수 있는 우리 동수원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것은 내 연약함가운데 주님이 역사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들 자신들을 주님의 도구로 헌신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약할 때 강함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주 주나의 모든것...
    내 잘난맛에 예수믿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과 사람을 동시에 슬프게 합니다. 내가 무슨일 하고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가 주님의 제자들에겐 더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자신의 몸을 가시로 찌르는 듯한 병을 앓고있던 사도바울의 모습을 오늘 우리는 읽습니다. 그 질병을 치유받고자 그는 세 번이나 하느님께 간청했다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네안에 내 은혜가 족하다 라는 말씀으로 화답하십니다. 때로 나를 짓누르고, 나의 활동과 사역을 방해하는 듯한 그 무엇에 묶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때론 그것이 우리를 겸손케 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나를 드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이렇게 겸손히 기도할수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세상을 구원하는 당신의 메신져로 파송한다는 사실입니다. 겸손, 모든 사역, 모든 선한일의 출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댓글 1

  • 김장환

    2003.07.11 18:05

    은혜로운 설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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