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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6월 15일] 로마 8:12-17, 요한 3:1-17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으로 들어가라!
  • 청지기
    조회 수: 4094, 2003-06-16 14:20:05(2003-06-16)
  • 지난 주일 성령강림절 설교 - 성령님은 인격이신 제 삼위의 하느님으로 그 이름 - 파라클레토스 : 가르쳐주고(teacher), 도와주고(helper), 위로해 주고(comforter), 변호해 주고(advocate), 상담해 주고(counselor), 대신 기도해 주는 중보자(intercessor)이자 힘주고 능력주는 이(enabler)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영적인 원리임을 알았습니다.

    한 주간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성삼위일체주일 주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한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 기독교의 핵심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야훼하느님은 오직 한 분 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인 두 가지 사건을 경험하면서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깨달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과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면서, 죽음을 이기고 부할하신 예수님에게 하느님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당시 로마의 다원주의적인 신관에는 반대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느님과 동일하게 경배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신분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하느님과 동일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체험입니다. 지난 주일 본문대로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충만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성령을 예수님과 하느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성령님이 두 분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부활, 성령충만 이 두 가지 사건을 하면서, AD500년 아타니시오주교가 정리한 삼위일체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인 아타나시오신경에 나와 있듯이, 초대교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느님이 계시면서도 오직 하나의 하느님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삼위일체로 일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창조 : 창세기 1장 1-3, 1절 ; 창조주 하느님, 2절 ; 성령하느 님, 3절 ; 말씀 하느님-성자(요한 1장),  1절,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2절,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절,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세례 : 마태오 28:19,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축복 ;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기도 ; 에페 2 :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배 ; 에페 5:18-20, "18 술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19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20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구원의 사역 ; 벧전 1:2,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세우신 계획에 따라 뽑혀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분의 피로 죄가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구절은 없지만,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많은 성경구절이 많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곧 하느님은 우리의 이성적인 사고틀 안에 수용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인간들에 의해 제한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어거스틴 성인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15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을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차도 결코 이 교리를 충분한 깊이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성어거스틴은 해변을 산책하다가 모래성을 만들어 바닷물을 그 모래성에 퍼담고 있는 어린이를 보고는 자신이 바로 그 어린이처럼 바다와 같은 하느님을 자신의 논리속에 집어넣으려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노력을 포기해야 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무에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가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해 보고자 노력합니다. 삼각형 / 크로바 잎 / 물 / 아들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남자 (이 모든 비유의 설명이 인격이신 삼위일체하느님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삼위일체하느님이라는 믿음을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에서 지식적으로만 동의하고 수용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그 삼위의 삶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 핵심이 됩니다. 삼위의 삶이란 하느님 스스로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의 삶을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은 창세 이전부터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셨습니다. 삼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이 충만한 사랑의 관계의 삶을 우리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관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에 대해서 성경이 소개하기를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지도자 정도되면 니고데모는 아마 성경을 거의 통째로 암기할 정도의 지식과 율법을 지키기에 남 다른 열심을 가진 그래서 종교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왜 찾아왔을까? 2절에 니고데모가 한 말을 보면, 아마도 니고데모는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가르침을 얻고자 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었나? 어떤 비결이 있나?" 지도자로서 체면은 있으니까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밤에 찾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보내주셨는데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기적을 보고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남과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거듭남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니고데모, 너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 교리적인 지식이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가 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가 너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곧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은 하느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믿을 때 얻게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역함으로 독사에 물려 죽게되었을 때 사랑의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구리뱀을 높이 들게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다 살려 주셨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긍극적으로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3장 16절,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사,"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스스로 충만하신 사랑이 흘러 넘침으로 죄인된 우리를 그 사랑의 관계속으로 들어와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삶, 이것이 창조의 원형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의 관심이 기적과 새로운 가르침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신실하신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나와 있는 우리의 관심이 기적이나 이 세상의 축복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여 친밀한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단절시키는 죄를 멸하시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멸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성령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도아 주시고자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오늘 서신 로마서 8:15-16,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러 보셨나요? 우리 아이들이 우리를 아빠라고 부를 때와 아버지라고 부를 때의 차이가 있지 않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하며 아빠라고 부르는 삶,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삶이 얼마나 든든하고 안정감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환경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에 환란이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죄된 습성과 연약함을 보고 참소하고 흔들 수 있습니다. '그래 너같은 놈이 하느님의 자녀냐?'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내가 하느님의 아들 딸임을 확신케하십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신실하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마침내 가장 좋은 것을 내가 주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낙심치 않고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으로 들어가 그분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치 마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시고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절대적으로 성령님에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성령을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믿음의 삶,  이것이 실제로 삼위일체하느님의 삶으로 들어가 사는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에 힘입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교리로 알고 지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 그 충만한 사랑의 관계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한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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