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3년 12월 25일] (요한 1:1-14) 성탄절
  • 청지기
    조회 수: 2541, 2003-12-29 08:33:07(2003-12-29)
  • 이번 성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깊은 성탄입니다. 이 곳 세마대 새 성전에서 처음 맞이하는 성탄이라는 점, 그 어느해 보다도 우리교회에 새 식구가 많이 태어났다는 것 - 세례 8명, 세례 갱신 7명, 합 15명, 그리고 아주 잘 준비된 성탄축하잔치로 온 교우들의 함께 기뻐하는 성탄이었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의 발표와 학생회의 워십, 청년회의 난타 공연, 아버지들의 연극, 어머니들의 노래 등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성탄망일을 보내고 오늘 성탄절예배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불황과 조류 축산 농가들의 피해, 정치권의 불의와 부패, 이라크 파병문제 등 축제의 분위기가 아닌 우울함으로 성탄과 연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 6살 5살 두 아이를 한강에 던져 죽인 사건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침울하게 만드는 아픔으로 기억됩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경축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크리스마스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날입니다. 즉, 태초부터 계셨고,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왜 인간이 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느님의 성육신이 필요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히 답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 대신 죽기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이며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무미건조하게 들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에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예배 때 읽은 성경말씀이 루가 1장 68절부터 시작되는 즈가리야의 노래였는데, 즈가리야는 아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78 이것은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분이라.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79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주님이 이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구원하실 분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공도문에는 “우리 하느님의 애절하신 자비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애절하신 자비’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느님의 애절하신 자비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을 맞아들이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고 합니다.

    1장 12절,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에 따라서 특권이 주어진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교리의 핵심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가지는 소중한 진리요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됨이란 다른 말로 해서 인간이 인간 되는 길은 결코 그의 선행이나 그의 지식이나 그의 의나 그의 공로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노력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내게 향한 말씀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수용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 됨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오심을 내가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마음을 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맞아들이는 자’, ‘영접하는 자’,  영접한다는 말은 믿는 것이요 믿는다는 말은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어떻게 영접합니까? 대접한다고 음식 대접한다고 대접입니까?

    인격과 인격과의 만남에서의 영접이란 듣는 것이요 믿어주는 것이요 신뢰하는 것이요 그리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홀만 헌터의 유명한 명화가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그림. 아마 여러분도 이래저래 카드에서나 화랑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림은 굳게 닫힌 문이 있습니다. 대문이 있는데 너무 오랫동안 열어본 일이 없어서 그 밑에 잡초가 우거졌습니다. 굳게 닫힌 문을 밖에서 등불을 들고 두드립니다. 노크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대문은 밖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손잡이가 없는 문, 그 대문 밖에서 등불을 들고 기다리고 두드리고 있습니다.     요한묵시록 3장 20절,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 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문 밖에서 두드립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른 이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냐?”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어떤 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를 누구냐고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나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사로 생각하면 나는 환자요,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나는 기적을 따르는 사람이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순간 바로 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고백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가 경험하게 두 가지 신앙의 내용이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믿으면, 임마누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그때 우리는 은총과 진리를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은총’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지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영접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데이빗 A. 씨맨스라고 하는 분이 Healing Grace 라고 하는 책에서 은혜의 장애물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첫째가 자기 의존입니다. 아직도 내 의, 내 노력, 내 어떤 것으로 인해서 무엇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의존도가 높으면 결국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둘째는 철저한 개인주의입니다. 개인주의자는 사랑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않기에 남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자는 엄청난 사랑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셋째는 철저한 행동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에 집착합니다. 누가 이런 새로운 이야기를 할 때에 "다 해봤어? 다 지내봤어?" 이것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경험한 것입니까? 내가 안다면 어디까지 아는 것입니까만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고 더 이상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 그릇된 태도를 버리고 하느님의 애절하신 자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심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생기고 깊어짐으로 진리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다 하는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 완전히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도를 말합니다. 그가 가르치는 훈련을 받는 것이고 그의 훈련 과정을 만족하게 여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어디로 인도하던지 아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지라도 믿고 따릅니다. 납득이 가도 따르고 안가도 따르고 이해가 되도 따르고 안되도 따릅니다. 그 전적인 순종, 그것이 바로 주를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완전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고 이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4 청지기 3121 2004-02-09
43 청지기 3690 2004-02-09
42 청지기 2317 2004-02-02
41 청지기 2850 2004-01-21
40 청지기 2688 2004-01-12
39 청지기 3506 2004-01-05
38 청지기 2998 2003-12-29
청지기 2541 2003-12-29
36 청지기 2545 2003-12-08
35 청지기 3431 2003-12-01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