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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11월 16일] (루가 21:25-36)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 청지기
    조회 수: 3437, 2003-12-01 08:23:08(2003-12-01)
  • 작년 월드컵 스페인전인가요? 안정환 선수가 경기 초반 페널티킥을 실축했다 해서 도중에 교체했다면, 연장 경기 후반의 그 기막힌, 세계를 흔들어 놓은 가히 역사적인 골든골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응원단의 큰 실망과 일부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히딩크는 그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믿고 기다려 주는 마음, 그것이 힘입니다. 기다려 보는 힘이 기적과 신화를 만듭니다.

    오늘부터 성탄절 전 4주동안을 대림절기로 지키면서 교회 전례력으로는 새로은 한 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대림절기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신앙의 훈련기간입니다. 기다림이 주제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뜻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 예수의 역사적인 탄생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것은 2000년 전의 일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류가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었고 그 은총이 오늘날에도 믿음을 통해서 우리 개개인에게 흐르고 있으니 마땅히 경축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성자 예수님이 스스로 피조물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인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리 경건하고도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이 예언한 내용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입니다. 앞의 네 가지는 다 이루어 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재림뿐입니다.   오늘 복음 27절에서도 분명하게 예수님은 스스로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20세기에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간 상태에 대한 풍자극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공연되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고도(God, 즉 하느님)를 기다리는데 고도(하느님)는 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풍자극입니다. 극중의 유일한 소품은 죽은 나무입니다. 그 죽은 나무는 하느님이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베케트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인생은 불합리하고,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을 믿는 것과 같은 죽은 조형물 없이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려고 메시야가 이 땅에 온다는 믿음은 우리의 모든 사상과 생각을 지배해서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런 믿음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극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속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이 오신다는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느님이 오지 않을 때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암시를 통해 베케트는 기다림의 축복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오늘 서신 성경에서 말세가 되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벧후 3:3-12). 많은 사람들이 의심과 절망 속에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을 싫증내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망 외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미사 중 니케아신경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때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라고 선포합니다.

    그 때를 알 수 없지만, 이 역사에 종말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로 오셔서 교회를 완성하시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고 그에 대한 믿음을 지킨 자는 영원한 생명을 그를 배척한 자는 지옥의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들의 일상의 삶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약속대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성령하느님이 믿는 이들의 삶가운데 은총으로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이 거룩한 예배 가운데 우리의 찬양 중에 임재하시고,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고, 기도 가운데 임재하시고, 성체와 보혈의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현존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음과 몸이 상하고 병든 자를 싸매어 치료해 주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주시고 사랑과 거룩의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문제는 실재하는 이 염연한 사실, 믿음의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체험하고 누리는 사람들의 있는가 하면, 꿈같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고 메마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너무 세상살이 골몰하여 현실적인 욕구와 쾌락에 집착해 있는 한, 결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은총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탄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고 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또한 지금 나의 삶 속에 임재하시는 주님을 갈망하는 것이 특별히 이 대림절에 되새기게 되는 신앙적인 의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회복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대림절을 보내야 할까요?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36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 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렇다면,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말씀은 34절의 말씀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 데 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경건의 시간 Q.T.와 기도를 1시간식 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서 주님은 안중에도 없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골몰하며 걱정하며 산다면 그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아마 그가 하는 Q.T.와 기도는 자기 근심을 해소하고 자기 복을 누리려고 하는 종교적인 행위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신은 하느님 앞에 깨어 기도하는 사람으로는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예수믿지 않고 살아가는 이방인의 삶을 행태를 버리라는 주님의 경고요 진정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진정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묵상할 때 성령께서 시편 1편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2절,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밤 낮으로 되새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가장 구체적인 현존은 성경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종일토록 되새기며 깨달음과 교훈을 얻어 살아가는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이고 깨어 기도하는 삶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는데, ‘쪽지수행’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첫시간에 성경말씀을 공손히 읽고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을 묵상하고 쪽지에 적어서 종일토록 그 말씀을 되새기며 그 말씀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하루를 마칠 때 말씀에 비추어 기도하는 삶을 말하는 데, 우리 모두가 해야하는 깨어있는 신앙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대림절을 지내는 두 번째의 자세는 ‘힘써 선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 베드로후서 3장 11절, 1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뿐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쓰는 것’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말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선교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주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고,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은 선교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7-8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가장 마지막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은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선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선교의 최전방에서 선교사님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여 하나님의 선교 명령에 같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내는 기도와 물질이 오지에 있는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도구가 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애쓰는 선교사님들의 눈물을 닦아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처럼 벅찬 감동이 어디에 있고, 그 일처럼 즐겁고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120년 전 흑암 중에 살던 우리나라에 성공회 고요한 주교님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님들이 찾아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살만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면 우리도 마땅히 선교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다 갈 수 없기에 우리를 대신해서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방에서 '희망의 사자로 가신 선교사님들'에게 희망을 드리기 위해 마땅히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선교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해서라면 후방에 사는 우리도 물질과 시간과 땀을 아끼지 말고 최선을 다해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지 모릅니다. 곧 하느님이 부르시면 하느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 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고, 항상 선교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더욱 동참하여 주님 만날 때 기쁜 마음을 만나 뵐 수 있는 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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