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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 2 - 이민규교수
  •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 많은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는 길을 오해한다. 현재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는구원의 길을 “사영리”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사영리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나 웨슬리언 전통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구원파식 “단박 구원론”을 조장한다.

    사영리는 물론 완전히 틀린 원리들은 아니다. 원리 하나 씩 본다면 다 맞는 말이다.사영리로 구원을 받는 이들도 있다. 사영리는 분명히 구원받기 위한 제자도의 필요성을 보충한다면 매우 훌륭하고 유익한 원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 고백(?)으로 영생을 약속하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구원의 길을 왜곡하고 오해하게 하는 치명적인 독을 포함하고 있다.

    믿음, 죄, 의, 은혜 등의 구원을 설명하는 다양한 단어들은 문맥을 떠나서 본다면... 상당히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는 모호한 용어들이다. 특정 구절에서 이 용어들의 정확한 뜻은 성경 전체의 맥락, 그리고 본문의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상당수가 이를 모두 무시하고 선택된 성경 구절들에 대하여 문맥에 벗어난 자의적인 해석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길을 왜곡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의 길을 설명하는 것은 쉽다. 다만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이다. 성경의 구원론은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로 요약된다(쉽게 천로역정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바른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상상이 된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을 보자.

    마가복음에서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

    마가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의 삶을 구원의 길로 제시한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인 승리에 이르신 길로 그의 고난과 죽음을 제시한다(누가 마태복음도 유사).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고난과 죽음의 길을 마다치 말아야 승리와 생명을 얻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기 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도록 하여라.” (막 8:34).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혹독하다. 생명을 얻는 길, 즉 구원을 얻는 길은 절대 쉽지가 않다(막 8:35. 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같이 적용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마 7:14, 마 18:8, 눅 13:23).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만 동시에 이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다. 즉 제자들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생명을 얻는다(막 8:34).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과 죽음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천한 자를 섬기는 낮아짐의 자세, 재물에 대한 청지기적 자세, 윤리에 관한 그간의 종교와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나사렛 예수를 모범 삼아 사는 것을 의미한다(막 9:32-37; 10:1-31, 35-45).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가치관에 맞는 윤리와 행동을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제자들은 모세의 어떤 계명들은 인간의 완악함과 몽매함으로 허락된 수준임을 알게 된다. 제자들은 오직 모세의 율법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원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야 한다(10:1-12),

    그리고 누구든지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마음을 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에도 마음을 열 것이다. 제자들은 지극히 낮은 자라도 섬기며 살아야 한다(9:33-37; 10:34-45). 그리고 오직 사회에서 가장 미천한 자처럼 빈손으로 하나님 나라에 다가서고 의존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의 팔에 안겨서 축복을 받을 것이다(10:13-16),

    제자들은 영생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특히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님에게 돌려 드리며(10:17-31)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살게 된다(10:21),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다. 누구나 제자도를 깨달음과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르심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들임을 알 수 있는가 말이다? 그것은 그들이 순종과 이타적인 섬김의 삶을 사느냐 아니냐로 알 수 있다. 마가는 순종과 낮아짐, 이타적인 삶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의 현재적 징표로 제시한다.

    지금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 그리고 제자의 삶을 사는 자만이 마지막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것이다. 반대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는 마지막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9:43-47; 10:15, 17-31).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제자의 삶에 긴장을 준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나 예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할 때 그들은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가는 어떤 복음서보다도 제자들에 대한 연약함, 오해, 실수 실패를 거듭 기술한다. 이 이유는 당시 청중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높은 윤리기준과 엄격한 삶이 요구될 때 실수와 실패는 부지기수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절대 예수를 떠나지 않고 그를 따른 제자들은 꾸준하게 변화되었고 생명을 얻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제자들의 실수와 실패는 모두 넘어지며 사는 우리를 위한 교훈이다. 누구라도 넘어진다. 그리고 넘어져서 구원을 못받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면 못받는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스승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왔다.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막 1:15).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가는 씨 뿌리는 자 (4:2-20),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라는 비유(4:2-29), 겨자씨 비유(4:30-32)로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내다본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 사이에 사는 이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단계는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이다(10:14-15). 어떤 종교적 제의에 헌신적인 것보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임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12:34, 제자도에 대한 깨달음으로 구원받음, 참조 요일 4:10-11,19-21 롬 13:8-9).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미래적이다(9:1, 47; 10:23-25; 14:25; 15:4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의미다(9:45, 47, 10:23-25). 그리고 영생과 미래 구원은 서로 통용되는 개념이다(참조 10:26).

    계속하여.
    P.S. 신약은 마태복음에서 부터 계시록까지 구원의 길에 대한 통일된 신학을 선포한다. 그것은 대중들이 많이 잘못알고 있는 바울의 구원론에서도 동일하다. 다만 저자와 청중에 따라 다양한 강조점들과 표현들로 설명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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