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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답지론 - 황병구 (많은물소리 편집자, 및 .... )
  • 다시 쓰는 미답지론, "나는 삶의 방식이요 원리요 모본이니…"

    [223호 특집 20대, 희망을 상상하다]
    2009년 04월 21일 (화) 황병구

    이른바 미답지론으로 알려진 내 글은 <복음과상황> 1997년 12월호에 편집위원 기고문으로 실렸었다. 복상의 새내기 편집위원이 당시 상종가를 치고 있던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을 다소 도발적으로 다루었고, 그 극명한 대조로 말미암아 여러 곳에서 원용되고, 토론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 글의 논지를 요약하면, 고지론으로 대표되던 ‘영향력 있는 지도층의 위치에 힘써 진출해서 주님 위해 살자’는 가르침은 성공주의 신앙관을 가진 이들로 인해 왜곡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 ‘부흥’ 찬양에 나오는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세우는 일이란 희생정신과 순교자의 삶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남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것이 고지로 진출하는 것보다 더욱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리라는 것 등이었다. 돌아보면 그리 새로운 주장도 아니었는데 이 논지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을 보면 당시에도 생각은 같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답지론을 한 번 더 읽어보기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잘 알려진 회중찬양집 ‘많은물소리’에 실린 읽을거리 중에서 쉽게 찾아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글의 원래 제목은 “스물두 살의 작은 예수들에게”이다. 이십대 초중반, 대학의 지평을 갓 넘어서서 사회에 진출하고자 하던 이들을 수신인으로 삼아 하고 싶은 말을 담았던 글이었기에 (사실 그때 나는 만으로 서른을 막 넘어서며 ‘서른 해를 지내며’라는 노래를 짓고 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시대의 과제 앞에서 이십대의 희망과 상상을 애써 이야기해야 하는 복상 지면에 모종의 책임감을 가지고 재차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다시 읽는 요한복음 14장

    이번 주는 2009년 고난 주간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세족 목요일이다. 요한복음 13장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교훈을 담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도 여기서 등장한다. 이어지는 14장 말씀에서 나는 낯익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주일학교 시절부터 이 구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고, 많은 이들이 구원자 예수님의 메시아적 유일성에 대한 확고한 근거로 암송하는 요절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이엄의 캐치 프래이즈인 이 언명은 죄의 권세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통로(길)이자, 인류의 철학적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진리)으로,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는 영원한 힘(생명)으로 새겨지곤 했다.

    대학시절 훈련받은 바에 따라 14장을 몇 번 더 읽고 묵상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서 몇 가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신학적 도움을 더 받아야 할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리 틀린 해석은 아니리라. 급기야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하시며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겠다던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또한 아버지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신비를 경험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렇다면 그분이 예비하실 처소는 우리와 함께 하실 거처와 다를 바 없다. 친숙한 찬송가 가사가 생각났다. “높은 산이 넓은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나라가 사후에 가는 우주 저편의 신천지가 아니고 우리의 현실에서부터 심겨지고 뿌리내려야 할 하나님의 주권이자 그 통치영역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제 내게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은 구원의 통로요, 철학적 해답이요, 영원한 목숨이라는 보편적 해석보다 다음과 같은 내 나름의 해석이 더 피부에 와 닿았다. “내가 곧 삶의 방식(Way of Life)이요 삶의 원리(Principle of life)요 삶의 모본(The Life)이니 나를 본받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자가 없느니라.”

    미답지로 가는 좁은 길

    어찌 보면 미답지와 고지는 단순한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길의 개념이다. 그것은 삶의 지향이자 삶의 방식에서 이미 구분이 되는, 즉 어떤 길에 들어서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될 수밖에 없는 종착지이다. 부산이냐 목포냐는 경부선이냐 호남선이냐에서 이미 결판난다. 세족식을 마치고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께 제자 도마가 그 길을 물었고 예수님은 그 길에 대해 담담히 대답하셨다.

    혹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본이 믿음도 좋고 능력도 출중해서 한국을 빛내는 하버드 박사 아무개라면 그와 예수님을 대치할 수 있는지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원리가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시장경제뿐이라면, 그것이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같이 보장자산 없던 이들의 몫을 염려하시던 예수님이 원하셨던 공존과 상생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가 구사해야 할 삶의 방식이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정글법칙이라면 이것이 서로 사랑하고 피차 복종하라는 신앙원리와 왜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지 100분이 모자라다 하며 토론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삶의 방식과 원리와 모본을 적(?)들의 페이스에 그저 맡기고 방치한 채, 우리는 왜 뒤쳐지고 선점 당하고 이류나 삼류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고민하는 것은 미답지로 가는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의 당당한 태도가 아니다. 앞선 세대들보다 기회가 적음을 한탄하며 과거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살짝 궁색하다. 앞선 세대가 정작 미안해 할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제 코가 석자였다는 것 정도이다. 이제 우리는 세대를 불문하고 주도적으로 삶의 방식과 원리와 모본을 설정하고 우리의 길을 개척하는, 세상 속에 심겨진 하나님나라의 사람들이라는 고집을 부려야 한다. 혹 자신은 개척할 역량과 열정이 딸린다고 절감하는 이들이라면, 뻔하게 뒤쳐질 다른 길 어귀에서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나름 애써 새 길을 개척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따라 나설 일이다.

    임상정신과 마루타

    미답지론을 쓴 죄(?)로 내가 치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고지로 가지 말고 미답지로 가자고 외친 사람으로서 내게 보장된 박사과정에 번듯하게 진학할 수는 없었다. 노래운동가와 공연기획자의 경험을 거쳐 새로 시작되는 방송사에서 PD 생활을 시작한 것도, 더 수월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보다는 교단 중심의 방송국에서 한국교회의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일면 주홍글씨로 취급받을지 모르는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선택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실험이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세금을 털어 MBA공부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변에서는 공학이나 신학, 음악 공부를 하면 훨씬 더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스스로는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에 좀 더 필요한 분야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마루타 삼아서 갔다. 언어든 전공이든 하나는 익숙했어야 했는데… 영어로 새로운 분야 공부하느라 흰머리만 많아졌다. 맨손으로 귀국한 이후에 아이들을 기르면서 한국의 공교육 문제를 떨어져서 비판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학교운영위원회에 자원해서 들어갔고 어머니들 사이에서 혼자 아빠이다 보니 운영위원장까지 맡아서 초등학교가 지니고 있는 지역사회센터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나름 애쓰고 있다. 내겐 그리스도인 커뮤니티를 벗어난 사회 관계망들이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또 하나의 미답지이다. 또 한 번의 마루타 경험인 셈이다. 솔직히 내겐 이런 과정 모두가 보람보다는 부담이 많은 선택들이었기에 혹여 자랑 섞인 간증처럼 읽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십대의 희망과 상상을 논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 취업문제는 늘 발목을 잡는다. 한국사회에서 젊은이들 상당수의 존재양식이 실업자 내지 취업준비생이라는 것이 서로를 우울하게 한다. 하지만 일터란 누군가가 일거리를 마련해 놓고 우리를 초대하는 곳이 아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돈이 되든 안 되든 늘 크고 작은 일거리를 만들어서 함께할 사람들을 내가 찾아다녔다. 자신의 삶을 임상정신으로 내놓고 한 사람이 애써 길을 만들면 그 길은 좁든 넓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길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다다르게 된다. 미답지는 길을 만드는 사람 없이는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의 삶을 놓고 씨름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도마처럼 나는 모른다고 정직하게 질문하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신비한 발견일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발에 물을 붓고 안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나라에는 일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터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일하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곳 삶의 방식이요 삶의 원리요 삶의 모본이니
    내 삶을 본받지 않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너희를 백수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일터를 저와 함께 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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