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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 역사탐구 - 영국 성공회의 강화도 선교
  • 조회 수: 3074, 2019-02-11 04:25:39(2019-02-11)
  • 박장희(어거스틴)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확산은 동아시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영국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진출하였다광저우홍콩난징상하이베이징 등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거듭 확장되었다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역시 같은 속도로 중국 내 선교 지역을 확장하였다. 1849년에 홍콩교구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중국이 공산화되는 1949년까지 모두 14개 교구가 활동하였었다.

    제국주의의 확산은 조선에서도 이어졌다강화도 조약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은 한반도에 진출하였다또한 이 시기에 서구국가와 더불어 그들의 종교인 개신교와 성공회도 함께 유입되었다미국의 개신교는 교파주의 교회였고 영국의 성공회 교회는 국가주의 교회였다미국 교회들은 교단의 충분한 지원을 배경으로 능동적으로 선교 상황에 대처하였지만 영국 성공회 교회는 국가의 정책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성공회의 조선 선교에 대해서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홍콩교구의 알포드(Charles Richard Alford, 1816~1898) 주교였다그는 성공회 선교 정책이 지나치게 아프리카에만 치우친다고 비판하고 동아시아와 조선그리고 일본에 대한 선교를 주장하였다전술한 바와 같이 성공회의 선교 정책은 영국인의 성사를 목적으로 하였기에 식민지가 가장 많았던 아프리카의 비중이 컸다알포드 주교는 이러한 수동적 선교 정책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다음으로 조선 선교에 대해 강조한 사람은 일본 성공회의 개척자로 알려진 쇼신부였다그는 본국에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보고하였고 1880년에는 일본인 전도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어를 공부하게 하였다또한 중국에 파견된 여러 주교들도 조선 선교를 요청하였다하지만 이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선교 기금의 부족함을 들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여 크게 진척되지는 못하였다.


     history2.jpg


    조선 선교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요청을 하고 행동에 옮긴 사람은 북중국 교구의 스코트(Charles Perry Scott, 1847~1927) 주교였다그는 조선 선교에 대해서 확신에 가까운 필요성을 느꼈다그 배경에는 네비우스(John Livingstone Nevius, 18291893) 목사가 있었다네비우스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였는데 조선의 상황에 대하여 능통하였다스코트는 네비우스를 통해 조선의 희망적인 선교 상황을 듣게 되었다특히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의 치료를 계기로 어의가 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성공담과 이에 따른 조선 정부의 호의적 자세도 큰 자극이 되었다그리하여 스코트 주교는 계속하여 벤슨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요청하였다결국 대주교는 조선 선교에 대한 승인을 하였다아마도 1883년에 체결된 조영 수호 통상 조약 이후로 조성된 양국의 우호적인 분위기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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