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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성공회의 역사와 정신(펌)
  • 조회 수: 6706, 2007-09-07 10:22:35(2007-09-07)
  • 성공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공교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 때에 헨리 8세에 의해서 로마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되어 나온 로마 카톨릭의 아류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 천주교에서 분리되어 시작된 교회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프로테스탄트(개신교) 라고 규정될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회는 중용의 입장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양극단을 포용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갖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교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성공회는 ‘잉글랜드 교회’를 모교회로 하여 그 역사의 뿌리가 중세를 넘어 초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영국의 역사와 함께 복합적으로 성장해 온 교회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공회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국(United Kingdom)이라는 이름은 17세기 초에 생긴 이름인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가 정치적으로 연합되어 이루어진 섬 국가입니다.)

    성공회를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2000년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 역사 모두를 배울 수는 없지만 성공회가 어떻게 시작하였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리고 성공회는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보고 성공회의 특징과 그 정신을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로부터 입니다(사도행전 2장).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40일 후에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10일째가 되는 날은 유다인의 명절인 오순절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 위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 때부터 제자들은 강력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복음 전파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된 사람의 모임(교회)은 점점 커지게 되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소아시아, 그리스, 시리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로마에도 전파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서 은밀히 전도활동을 펼쳐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도성’을 기준으로 하는 주교 중심의 교회발전

    오순절 이후 예수님의 직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가 지나가고, 2, 3대 제자들이 전도활동을 하면서, 교회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이 죽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이단적 가르침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각 지역의 주교들은 사도들의 처음 가르침을 이어 받은 ‘사도성’을 기준으로 삼아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지켜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순교 이후 사도성의 계승과 정통성은 각 지방의 주교에게로 전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처음부터 주교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주교 중심의 교회는 큰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예루살렘, 안티옥, 에페소,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로 그 세력이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승인하자 이 때부터 교회는 로마제국의 확장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되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권도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지게 되고, 교회의 직제와 예배 양식도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로마교회의 위상강화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은 교회의 중심이 처음부터 로마였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 시작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 지방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그 세력권이 퍼져 나가면서 그 지역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나 혹은 로마 주교가 계급적인 수좌 역할을 한 것도 아니고, 각 주교가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사도들로부터 이어온 정통의 카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협력하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승인하면서 로마의 세속적 권력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 교회의 중심이 로마로 이동되고 맙니다.
    나중에는 로마의 주교가 성서에도 그런 호칭이 없는 ‘교황’이 되고 맙니다.
    4세기 말에 있었던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승인은,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위한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전승이 로마의 세속적 권력과 문화에 의해 희석되어진 암울한 시절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초대교회의 카톨릭 신앙이 성공회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이어져 왔습니까?

    초대교회의 잉글랜드 전래

    글래스톤베리의 한 작은 마을에는, 수령이 이천년에 달하는 나무가 서 있습니다.
    이 나무는 오늘날 영국 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무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 대한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경험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전도여행을 시작하여 마침내 잉글랜드의 이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최후만찬 때 사용한 성작聖爵을 항상 가지고 다녔고, 자신이 도착한 이 마을의 언덕에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짚고 온 지팡이를 꽂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지팡이가 땅에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든든히 서 있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곳에 서 있는 나무가 예루살렘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와 같은 품종의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슬러 올라가보면 예수님이 쓰셨던 가시나무도 바로 이 품종의 나무였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전설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지만 참 아름다운 전설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언제 잉글랜드 땅에 전해졌는지에 대한 연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사도 바울이나 필립 또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전했다는 전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로마와 초대교회의 역사적 문헌을 통해 추측해 볼 때, 잉글랜드 땅에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115년경 작성)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 클라디우스가 잉글랜드 원정에 파견한 장군 중에 프로챠스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개선하여 온지 얼마 뒤에 그의 휘하 부대에서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부하 장교의 부인으로 잉글랜드 사람 폰포니아라는 여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받아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여인은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유는 프로챠스 장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기록한 타키투스는 이 일이 기원 후 56년경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그 여인은 잉글랜드 원정에서 데리고 온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1세기 중엽에 이미 잉글랜드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200년경 유다인을 공격했던 터툴리안(Tertullian)의 소책자와 240년경 오리겐이 쓴 글에서도 잉글랜드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를르 공의회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후, 314년에 그리스도 교회가 있는 모든 지방의 주교들을 소집하는 ‘아를르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공의회는 주교들의 회의를 뜻합니다.
    이 공식적인 주교회의에는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를 대표하여 세 분의 주교가 한 분의 사제와 한 분의 부제를 데리고 공식적으로 참석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비록, 325년 니케아공의회에는 참석치 못했지만, 성 아타나시우스는 잉글랜드 교회가 니케아공의회의 결의를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정황을 통해 살펴볼 때 잉글랜드에는 적어도 1세기 중엽 경, 즉 사도 베드로, 요한, 바울로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복음의 씨가 뿌려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정 조직을 갖추게 되었으며, 4세기 초에는 ‘공의회’에 주교들을 참석시킬 정도로 이미 많은 성장을 한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304년경 로마의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기간에 순교한 성 알반이 기록으로 남겨진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지만, 이미 그 이전 초대교회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잉글랜드 땅에 대한 초대교회 시절의 복음 선교를 강조하는 이유는 성공회의 시작이 로마교회로부터 기원한 것도 아니고, 로마교회의 아류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대교회 때로부터 면면히 잉글랜드 내에는 그리스도교가 형성되어 발전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잉글랜드 토착교회(켈틱교회)로서의 성장

    초대교회 시절부터 잉글랜드에 선교된 교회는 7세기 초까지 박해 없이 독자적으로 북서부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합니다.
    4세기 말에서 6세기 말까지 잉글랜드 토착교회는 나름대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쳤고,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으며 또한 당시 켈트족의 문화를 수용한 이른바 ‘켈틱영성’이라는 귀한 전통을 갖게 됩니다.
    성 니니안, 성 패트릭, 성 콜롬바 등의 인물들은 바로 이 시기에 활약한 분들입니다.

    로마교회의 선교사 파송과 성공

    5세기 무렵 잉글랜드에 대한 로마의 통치가 끝나면서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597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로마의 수도사 어거스틴(참회록을 쓴 교부 어거스틴이 아닙니다)과 40명의 선교단을 잉글랜드에 파견하여 새로이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 선교단이 도착한 곳이 잉글랜드의 켄트 지역인데 당시 켄트 지역을 다스리던 왕의 도움으로 기대 밖의 선교 성과를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 성장하기 시작한 잉글랜드 내의 로마교회는 앵글로-색슨 교회로서 점차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고, 기존의 잉글랜드 토착교회인 ‘켈트교회’와의 사이에 초대교회의 전승을 지켜나가는 데 있어서 갈등과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휘트비 종교회의

    633년 오스위 왕은 휘트비 종교회의를 열어서 잉글랜드 토착교회와 로마교회의 통일을 이루게 합니다.
    내용적으로는 토착적인 켈트교회 대신에 로마교회의 관할과 전통을 따르기로 한 이 회의의 결정으로 인해 비로소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는 로마교황청과 연관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대륙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어 문명화에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7세기 이후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는 로마교회에 속하게 되어 교황의 관할을 받으며, 중세시대 교회의 특징을 공유하게 됩니다.
    8세기 잉글랜드의 학문수준은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몇 몇 성직자들은 대륙에서 학자와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 덴마크의 침입을 받아 많은 수도원이 파괴되면서 학문이 약화되기도 하였습니다.
    10세기 들어 웨식스 왕들이 잉글랜드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자 교회 역시 개혁되기 시작했고, 11세기 중엽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자 잉글랜드는 라틴계 유럽 문화에 보다 가까워졌습니다.
    11세기 교회사적 인물로는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성 안셀름이 유명합니다.
    그는 「모노로기온」과 「프로로기온」을 저술하여 하느님을 존재론적인 이론으로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론을 서술한 그의 유명한 책입니다.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의 순교와 존 위클리프

    12세기 말 잉글랜드 내에서 왕권과 교황권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발생합니다. 이른바 ‘대성당의 살인’ 으로 유명한 토마스 대주교의 순교가 그것입니다.
    왕과 대립하다가 측근에 의해 암살당한 대주교의 순교로 인해 잉글랜드 내에서는 오히려 로마 교황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들 역시 중세 후기의 특징인 종교적 불안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14세기 종교개혁가이며 신학자인 존 위클리프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혁명적인 비판자였으며, 성서를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위클리프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헨리 8세의 로마교회와의 단절(16세기)

    중세 로마교회의 부패로 인해 대륙에서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16세기에 영국의 헨리 8세는 정치적인 동기로 1519년 로마교회와의 관계단절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왕세자생산과 관계된 문제인데,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 헨리 8세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에 왕세자생산은 한 왕조의 존속과 관계된 문제였으므로 의회는 1534년 왕을 돕기 위해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헨리 8세를 인정함으로서 로마 교황청과 결별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던 헨리 8세의 이같은 결정은 또 다른 교회를 만들기 위한 신앙적 동기로서 발생한 종교개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는 비록 로마교회와는 결별하였지만, 여전히 잉글랜드의 교회가 카톨릭교회로 남아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잉글랜드 내에서 로마교황의 정치, 경제, 사회적 영향력을 끊어내고 잉글랜드의 국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다분히 정치적, 민족적 동기에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 내에서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로마교회의 간판을 내리고 잉글랜드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헨리 8세가 로마교회와의 단절을 시도할 만큼 성장한 잉글랜드 국민이 지닌 국민국가주의 의식이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종교개혁

    대륙에서 발생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으며 신앙적인 내용에 있어서 로마교회로부터 벗어나려는 개혁은,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 때 이루어집니다.
    에드워드 6세는 제위 6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받아들였습니다.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주도로 이루어진 개혁의 과정에서 저항하던 많은 로마카톨릭 교도들이 희생당하기도 했습니다.

    메리여왕의 로마교회로의 회귀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하자 그 뒤를 이어 이복동생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캐서린 왕비의 딸로서 열광적인 로마카톨릭 신자였습니다.
    메리는 여왕이 되자 지금까지 개혁이 진행되어 온 교회의 모습을 다시 로마교회로 되돌려 놓으려 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또 다시 크나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의미하듯 이번에는 프로테스탄적 개혁을 추진했던 사람들의 숱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희생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다 믿음을 지킨 ‘순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사람을 구원하자는 종교가 극단적인 입장을 고집하면서 도리어 서로를 향해 살육을 반복했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의한 성공회 확립

    뒤를 이어 1558년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군주로 유명합니다.
    여왕은 종교가 야기하는 국론분열과 살육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중용과 포용의 정신’으로써 영국의 종교개혁을 마무리 지으며 ‘성공회’의 기틀을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시절 성공회는 국교로 확립됩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와 로마카톨릭 사이의 양 극단적 대립을 극복하는 잉글랜드 상황 내에서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잉글랜드 교회가 외국, 특히 로마교황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수장령, 통일령, 무적함대, 청교도와 같은 말을 여러분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시절에 생긴 일들과 관련 되어있습니다.

    한편, 로마교황청은 잉글랜드의 국교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결국은 실패하였는데, 결정적으로는 잉글랜드의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해 버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잉글랜드는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청교도 혁명과 ‘고교회’ 시대 (17세기)

    국교회로서의 성공회 확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내에 종교적인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는 정치적인 역학관계와 맞물리며 크롬웰에 의한 ‘청교도혁명’(1642-1651) 시대를 거치고, 또한 왕정복고를 통하여 고답적인 로드 대주교에 의해 로마교회와의 유대를 회복하려는 고교회적인 시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산업혁명기와 요한 웨슬레의 복음주의 운동(18세기)

    대영제국의 발전과 더불어 성공회는 전 세계로 확산됩니다.
    그러나 영국국교회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적인 변화의 요구에 그렇게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등장한 인물 가운데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요한 웨슬레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직접 거리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여 민중들 속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운동’이 훗날 또 하나의 성공회 전통으로 더해져 갔던 것입니다.
    이 복음주의 운동은 종교개혁기를 거치면서 성공회 안에 흐르고 있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성공회 사제이기를 원했던 요한 웨슬레의 의도와는 달리 추종자들은 이후 오늘날의 ‘감리교’를 세워 분리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요한 웨슬레의 영향력은 성공회 내에 ‘복음주의’ 라는 값진 유산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옥스퍼드 운동’을 통한 교회전통의 재인식(19세기 중엽)

    국가 권력에 예속되는 국교회로 안주하기를 거부했던 옥스퍼드 운동은 성공회의 카톨릭 유산을 강조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교회의 전통과 예전과 성사를 중시했는데, 이는 특히 한국교회의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국에 선교사로 오신 분들이 바로 이 옥스퍼드 운동을 통한 이른바 ‘고교회(High Church)’에 속한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이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유산의 강조라면,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은 카톨릭 유산의 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유산은 성공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각각 고교회파(High Church)와 저교회파(Low Church)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형성과 교회일치운동에의 기여

    오늘의 역사 속에서 성공회는 더 이상 영국의 국교회가 아닙니다.
    성공회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고, 각기 관구로서 독립되어 있습니다.
    로마교회처럼 교황제도나 중앙 집권제도를 택하지 않고 각각 독립된 지역교회들의 상통이라는 형식으로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개교회, 교무구, 교구, 관구, 세계성공회’ 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고민할 수 있고, 그러한 고민과 결정이 각 지역의 특성과 현실을 반영한 ‘자율적인 협력’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 있습니다.

    아시아 쪽에서는 대부분의 성공회가 다른 교파에 비해 나중에 선교되어 교세가 작은 탓도 있지만, 세계성공회공동체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게 되면 성공회가 본질적으로 교회사에서 간직해 온 풍부한 전통과 카톨릭 교회로서 지녀온 그 의미와 역할에 대해 결코 평가절하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독특한 역사와 경험을 통하여 양극단을 피하고 중용과 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하는 성공회 정신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윌리암 템플 대주교 등이 교회일치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내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공회는 2000년의 교회 역사를 통하여 어느 특정 인물이나 지역, 시대에 제한된 신학이나 사상을 유일무이하게 배타적으로 내세우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영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여러 경험을 보편적 신학과 사상으로 정리해 내어 하느님의 진리에 가깝도록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혁해 가는 교회’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회에는 ‘초대교회의 믿음’과 ‘켈트교회의 영성’, 그리고 ‘로마카톨릭 교회적인 전통’과 ‘개신교적인 복음주의의 열정’이 함께 어우러져서 굳어진 정체성이 아닌 다양성 속에 일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착된 정체성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개혁하고 변화해 가는 과정 속에서 성공회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진행된 종교개혁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교회였지만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 탄생한 교회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청지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9-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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