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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의 역사
  • 청지기
    조회 수: 10139, 2003-06-25 13:59:49(2003-06-25)
  • 성공회의 역사 - 정철범(마태) 주교
      
    성공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는 소위 공교회로서 오늘날 세계적인 교회로 자리잡고 있다.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되어 나온 3대 그리스도 교단(다른 두 개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하나로서 로마 가톨릭도 아니고 일반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중간 위치에서 양쪽을 포용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성공회는 영국교회를 모교회로 하여 그 역사의 뿌리가 중세기 이전 영국역사에까지 뻗어 있다. 이와같이 성공회는 영국의 역사와 함께 복잡하게 성장해 온 교회이므로 그 역사적 배경을 파고 들어가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 즉 구교와 신교의 요소를 다 포용하면서도 결코 구교와 신교의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중용의 노선에서 그 독특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편의상 세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다루는데 첫 장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영국교회 즉 초기선교와 교회의 정착 그리고 중세기 교회와 국가의 갈등을 통한 국가주의를 다루고, 제 2장에서는 영국교회 탄생을 배경으로 한 개혁과정을 다루고, 마지막 제 3장에서는 17세기부터 영국교회가 어떻게 자존(自存)과 발전을 하여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I. 종교개혁 이전의 영국교회

    (1) 켈틱교회와 영국의 초대교회

    켈틱족은 원래 구라파의 북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위스에 이르는 광대한 고울(Gaule) 지방에 살던 족속으로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서 영국에 들어와 원주민을 쫓으면서 영국의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켈트족은 자연히 구라파 대륙과 접촉을 많이 하게 되어 상인, 여행자, 군인 등을 통하여 AD 175년경 기독교가 영국 땅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한 당시 형편으로 4세기에 이르도록 교회활동은 매우 부진하였다. AD 314년 프랑스 아를(Arles)에서 종교회의가 있었는데 당시 영국의 구교 레스티투투(Restitutus)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6세기에 이르러 독일의 종족이었던 앵글(Angles)족과 색슨(Saxon)족이 영국에 침략하여 본래 영국에 살고 있었던 켈트종족들은 영국의 서부 웨일스와 북쪽인 스코틀랜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켈틱교회의 위대한 선교활동은 성패트릭(Patrick)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패트릭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유럽본토에서 교육받고 아일랜드로 가서 열렬히 전도하여 수십 개의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수천 명의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패트릭이 세운 수도원은 로마제국의 멸망과 사라센 침공 때 유럽을 떠나게 된 신학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패트릭이 조직한 교회는 수도원적인 요소가 강했으며 수도원으로부터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패트릭의 설교와 가르침은 그 후 아일랜드만이 아니라 중세기 유럽대륙의 선교활동과 교회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활동한 아일랜드 출신 성콜럼바(Columba)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콜럼바는 AD563년에 12명의 동료와 함께 스코틀랜드 아이오나의 한 작은 섬에 자리잡고 수도원을 세워 여기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선교사들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와같이 콜럼바는 아직도 조직과 훈련이 미약했던 영국 북부지방 켈트족들에게 교회 교리를 지도하여 후에 스코틀랜드의 사도라 일컬었고 이러한 활발한 선교활동은 로마의 선교사 어거스틴이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기반을 닦아 영국 토착교회의 터전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성콜럼바너스(Columbanus)는 아일랜드 켈트교회 출신으로 14명의 동료수사를 데리고 유럽대륙에 가서 스위스, 북이탈리아, 독일땅 등지에 곳곳마다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선교활동 중 가끔 로마교회 주교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로마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상과 같이 아일랜드 중심의 켈틱교회 출신 선교사들의 활동이 유럽대륙에 남긴 공헌을 찰스 로빈슨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당시 아일랜드인들이 세운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지로 고전어 특히 희랍어에 능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함으로 교회학문의 표준과 이상을 앙양했으며,

    둘째 참회제도를 보편화하여 이 원리들을 수도자와 세속인들 생활에 적용하였고,

    셋째 유럽대륙에 수도원 제도를 소개하였으며 수도원은 관구의 주교에게 제재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일깨워 준 점이다.

    당시 아일랜드 교회생활을 보면 세속의 성직자는 물론 수도자들도 결혼할 수 있었으며 교회에는 제단이 없었고 장식도 없었으며 미사는 라틴어가 아닌 지방어로 거행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 영국에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에 로마교회와 관계없이 그 나름대로의 토착화된 국민교회가 확립되어 있었고 이들은 초대교회 모습대로 교회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로마교회의 선교와 앵글로 색슨인의 개종

    AD 590년에 수도원 출신이 로마의 주교직에 취임했는바 이분이 바로 그레고리 I세 교황이었다. 로마제국의 폐허 위에 강력한 지배력을 갖는 교회를 건설하는데 크게 기여한 그레고리 교황은 선교활동에도 크게 관심을 갖고 AD 596년에 수도원장 어거스틴과 동료수도사 40명을 영국선교를 위해 파송하였다.

    그 당시 영국은 앵글로 색슨족들로 이루어졌던 여러 개의 작은 왕국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에델버트(Ethelbert)의 왕국인 켄트지역을 찾아갔다. 선교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지고 켄트왕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어거스틴은 영국에 있어서의 주교 임명권을 임명받고 곧 이어서 켄트의 수도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후로 캔터베리는 영국의 그리스도교 중심지가 되었다. 캔터베리에 자리잡은 어거스틴은 그해 말에 1만명의 색슨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로 개종하는 숫자가 늘고 동시에 각 지역에 주교가 임명되어 교회를 다스리는 등 로마교회 세력이 차츰 북쪽으로 확장됨에 따라 영국 북부에서 발생하여 아이오나와 아일랜드에서 온 켈트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 활동으로 남쪽으로 진출하던 수도원적 주교제도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또한 로마교회의 확장은 비점령지인 아일랜드, 웨일즈 등 서부지방에 이전부터 자리잡고 있던 영국초대 토착교회인 브리타니아파 교회와의 사이에도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거스틴 대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교회는 켈트교회 주교들에게 세 가지 양보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부활절을 같은 날에 지낼 것, 둘째 세례는 로마의 양식대로 할 것, 셋째 이교도인 앵글로 색슨에게도 복음을 전할 것" 그러나 켈트인들은 자신들이 조상을 침략하여 몰아냈던 앵글로 색슨인들을 증오한 나머지 쉽게 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양교회의 분쟁지역이었던 노덤브리아(Northumbria) 왕국의 오스위(Oswy) 왕이 양파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양파가 서로 진술할 종교회의를 위트비(Whitby)에서 소집했다. 왕은 양쪽교회의 주장을 경청한 후 로마교회 주장에 찬성하였다. 로마 가톨릭 승리로 끝나자 켈트교회는 부득이 로마교회 주장을 다루게 되었고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국 내에서의 로마교회 세력은 영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영국내의 교회는 모두 로마 교황에게 순종하기에 이르렀다.


    (3) 국가교회의 기반확립

    위트비회의 결과로 영국은 하나의 그리스도교로 종교적 통일을 이룩했고 이것은 곧 영국의 정치적 통일을 가져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영국에서의 교회는 국가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종교적 통일이 소왕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특별히 이 시대에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 데오돌 캔터베리 대주교를 들 수 있다. 데오돌 대주교는 국가교회 기반을 형성하는데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공헌을 하였다. 첫째 성직자의 자질향상에 힘썼고 교회의 이방인 리더쉽을 주장하여 자신을 마지막으로 하여 다음부터는 색슨 영국인이 대주교가 되었다. 둘째는 교회를 치리하는데 현대의 의회제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교회회의제도를 실시하였다. 또, 한 사람의 공헌은 성베다(St. Bede)의 활동이었다. 성베다는 자로우 수도원 수사로 있으면서 성서와 역사와 교부들의 문성에 통달한 대학자였다. 또한 문학과 박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의 대표저서라 할 수 있는 "영국 민족교회사"는 연대기식의 역사서가 아닌 비판적 방법의 새로운 역사 해석을 시도한 책으로 중세기 가장 우수한 역사서로 꼽힌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역사적 전통과 건전한 학술을 강조하는 성공회 전통에 크게 기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4) 중세기 영국교회와 국가주의

    중세에 접어들면서 영국 국가와 교회는 많은 변천을 겪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덴마크족과 노르만족의 침입과 그에 따른 변화이다. 북구라파의 노르만족과 덴마크족의 침입으로 영국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무엇보다도 구라파 본토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점이다.

    가장 큰 변화는 봉건제도 실시였다. 노르만공이었던 윌리암왕은 봉건제를 실시하면서 교회에 토지를 주었다. 원래 영국 색슨인 주교들은 교회 양무리에 봉사하는 단수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왔는데 봉건주의를 실시하면서 주교들은 위대한 군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주교는 목회자라기 보다는 지배자가 되었고 교회법정에서는 재판관이 되었다.

    윌리암왕은 색슨인과 노르만인의 동화에 힘썼고 유능한 교육과 행정훈련 받은 노르만인 출신을 교회지도자로 삼아 영국교회를 개혁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섬나라가 갖는 고립을 탈피하고 구라파 대륙의 교회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중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영국 교회가 겪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화와 국가의 관계였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주교가 봉건적 군주로 등장하고 교회를 치리하고 재판하는 법적 권위를 인정한 것이 교회와 국가사이의 분쟁을 혼란하게 만든 중요 원인이 되었다.

    주교는 왕이나 혹은 교황이 임명하여 성별되었는데 주교가 되면 왕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관리하며 왕에게 속하는 신하였고 교회에 있어서는 교회를 다스리는 고위목자로서 교황에 속하는 신하였다. 그러면 왕과 교황 중 누가 상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영국에서는 마침내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케트 캔터베리 대주교사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실추된 왕구건을 회복하려는 헨리 2세는 영국내 교회의 독립과 교황의 지배에 대해 못 마땅해 생각했다.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는 교황지상권 이론을 주장하여 국왕 헨리 2세와 맞서다가 결국은 살해당하고 말았다. 중세기말에 와서 실제로 법왕청은 영국교회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착취하였고 영국교회의 고위직은 교황이 임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직책만 갖고 실제 영국교회에 오지 않고 자리를 비워놓고 앉아서 수입만 받았다. 여기에서 자동적으로 심한 반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욱이 영국은 섬나라였고 대륙의 신성로마제국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내의 왕이나 성직자나 국민들은 외국의 법왕권위가 지배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들이 합력하여 국가교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국가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에대한 구체적인 행동이 나타났으니 에드워드 1세 때 국회에서 반법왕청에 관한 법안이었다. 그 중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도원이 더 이상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법, 로마 법왕청으로 지불되는 돈을 막는 내용의 법, 로마법왕이 영국교회 주교 임명하는데 마음대로 못하는 내용의 법 등이었다. 이와 같은 반법왕청 입법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교황들이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였으며 프랑스왕에게 종속되어 아비뇽에 거주하여 그 권위가 상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법왕청 입법의 내용이 아니라 이 시대에 입법된 법률이 앞으로 올 종교개혁시대에 사용됐다는 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싹튼 국가주의 의식이 일치된 영국인 전체의 행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고 이것이 후에 영국의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는데 큰 힘이 된 것이다.


    II. 영국의 종교개혁

    (1) 개혁의 배경

    중세기는 어둔 밤을 연상하리 만큼 무지와 미신과 무기력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시대의 여명으로 나타난 현상이 곧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었다. 르네상스란 좁은 의미로 희랍과 로마의 문화의 회복과 문학과 예술의 부흥을 뜻하는 것으로 재생산한다는 뜻이다. 넓은 의미로 봉건주의로부터 새로운 질서의 사회조직으로의 변화이며 지식의 해방이고 이성적 비판의 발생이며 인간 관심사의 확대라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여행, 탐험, 무역 및 상업을 조장시켰으며 인쇄술을 발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시가 발달하여 인구가 증가하고 공업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와 도덕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즉 교육이 수도사들의 통제에서 해방되었고 학자들은 성서를 원어로 연구하며 교부들의 저서도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알버트 슈만은 다음과 같이 르네상스가 교회에 끼친 영향을 말하면서 종교개혁의 터전이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첫째 스콜라주의적 신학보다도 플라톤적인 이상주의를 앙양하였다.
      둘째 성서를 원어인 희랍어와 히브리어로 연구함을 주장하였다.
      셋째 개인적인 사고를 조장하고 미신을 없애며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넷째 개인의 사상과 예배가 외적인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와같은 르네상스의 영향과 함께 영국내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죤 위클리프였다. 그는 사제로서 학자로서 훌륭한 설교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왕의 채플린으로 특사자격을 갖고 구라파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그러한 경험과 스스로의 학문연구를 통해 당시 법왕청과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통감할 수 있었다. 교황의 세속통치권을 반대하였으며 화체설을 포함한 교회의 교리가 비성서적임을 논문을 통해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처음으로 성경으로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교리를 성서의 뜻에 비추어 재조명해야 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점이 바로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주요쟁점이었으며 위클리프는 신앙적 양심에 입각하여 교황에게 반기를 들고 개혁을 주장했던 것이다. 또 한사람 개혁의 선구자요 개혁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에라스무스(Erasmus)였다. 에라스무스는 화란출신의 로마교회 사제로서 인문주의 활동을 통해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리석음의 찬양"이란 책을 저술하여 당시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일반인의 조롱의 대상이 되게 한 내용으로 당시 교회의 타락상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는 로마교회의 개혁을 원했지만 과격한 방법의 극단적 프로테스탄트를 싫어했으며 이성과 교화로써 개혁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를 연구하여 교부들의 지혜와 교훈을 존중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중용과 자유를 주장하여 영국내의 보수·진보 양측 학문을 닦은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영국이 자체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에라스무스의 중도론(Via Media)은 영국의 튜도왕조 특히 엘리자벳 여왕 하에서 행하여진 일련의 종교 문제 해결 과정에서 근본적 토대의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교회사학자 루이스 스피츠는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에라스무스의 가까운 친구인 죤 콜레트(John Colet)는 옥스퍼드 출신으로 성직자모임에서 유명한 설교를 했는데 그는 설교를 통해서 성직자들의 야심과 물욕, 그리고 교회법원에서 부과하는 과다한 요금, 일반 성직자들의 무식과 세속성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지를 소유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으로 개혁의 초석이 놓아졌고 대륙에서 먼저 일어난 개혁의 물결에 영향 받아 영국에서도 서서히 개혁의 시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헨리 8세

    헨리 8세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젊고 학문과 외교가 능란하고 탁월한 신학지식을 가졌으며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어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로마와의 단절을 가져오게 된 시초는 그의 비극적인 결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미망인이며 형수인 카더린(Catherine of Aragon)과 결혼하였는데 이 결혼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닌 국가이익을 위한 정략적 결혼이었다. 교회법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황 줄리어스 2세는 이 결혼을 허가하였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영국국가를 위해 왕자탄생을 원하는 헨리 왕에게 왕비 카더린은 왕자를 낳지 못하였던 것이다. 헨리는 이혼하고 궁녀 앤볼린(Anne Boleyn)과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대한 법왕청의 소속을 대법관인 울지 추기경에게 맡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은 당시 교황이 독일의 황제 찰스 5세의 보호아래 있었는바 찰스 5세는 헨리의 왕비 카더린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헨리 왕은 대륙의 개혁자 루터사상에 젖어있던 토마스 크롬웰을 대법관으로 임명하고 토마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자신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이혼사건을 크랜머 대주교 주재 하에 재판하여 캐더린과의 결혼은 무효이고 앤과의 결혼이 합법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교황이 헨리 왕을 파문하자 헨리 왕은 의회로 하여금 앤볼린을 왕후로 승인하게 하고 영국교회에 있어서 지상의 유일한 최고 권위자가 자신임을 통과하게 하였다. 이로써 영국교회가 로마로부터 분리되었음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것이다.

    1536년부터 부분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해에 크랜머는 아우그스버그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하여 십 개 신조를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성서 세 가지 신조, 초대교회의 4대회의 그리고 성세, 고해성사 내용을 포함시키게 했다. 1538년에 크롬웰은 다른 법령을 내려서 크랜머가 번역한 성서를 교회에서 사용하게 하고 교회 내 성상을 금지하게 했다. 이어서 1539년에 헨리 왕은 여섯 가지 신조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화체설, 떡 한가지의 영성체, 성직자의 독신생활, 정절서약, 고해와 개인의 사적미사였다. 이 내용은 개혁이 아닌 것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법을 어겨 처형당하기도 했다. 결국 헨리 왕의 근본의도는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고 교회의 폐습과 부패상을 순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왕권과 국가주의를 강화하려는 것이 자연히 왕자문제와 이혼문제를 가져왔고 때마침 외국의 지배와 구속을 벗어나려는 강한 국민의식과 일치되어 로마교회와의 단절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교회사가 모로아도 그의 "영국사" 책에서 "헨리 8세의 이혼은 왕자를 얻어 전쟁의 위험을 피하고 영국국가를 강하고 안전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그의 개혁시도는 군주로서의 무정견한 망동이 아니라 섬 나라적이고 언어적인 국민의식의 종교적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헨리 왕은 법왕청을 거부하였으나 영국교회는 가톨릭주의에 충성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 가톨릭주의에 충성하는 원리는 헨리 왕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성공회는 단절됨이 없이 역사적 계속성을 유지하게 것이다.


    (3) 에드워드 6세 치하의 개혁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에게서 태어난 10세 된 아들이 대를 이으니 이 어린 왕이 에드워드 6세였다. 어린 왕의 외삼촌 소머셋트(Somerset) 공이 섭정이 되자 그간 악평이 자자했던 6개 신조를 폐지하였다.

    소머셋트 공은 대륙의 개혁사상에 이미 감화 받은 바 있고 헨리 왕 때부터 왕을 도와 개혁을 시도해 오던 크랜머 대주교와 함께 본격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루터와 칼빈주의의 개혁자들은 영국 각처에서 환영받게 되었고 국가교회로서의 통치기능이 상실되어 무질서와 혼란이 오기도 하였다. 1547년에 성직자의 결혼이 공인되었고 법령을 발표하여 교회 내 성상안치를 금하고 성찬예식 시행법을 발표하여 영어로 미사를 거행하고 미사 중 영어로 서신과 복음을 읽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개혁의 공과는 크랜머 대주교에 의한 공도문 제정이다.

    크랜머 대주교는 대학시절부터 로마교황이 전 기독교 세계에 최고 권위자라는 주장이 성경이나 초대교회 역사에도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예배의 개혁으로 자기 국민들로 하여금 자기나라 말을 사용하는 예배에 참석케 하여 살아있는 진리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는데 있었다. 1549년에 크랜머는 마침내 영국 최초의 공기도서를 만들었다. 이 책의 중요한 점은 중세기의 잘못된 교리와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고 예배의식을 간소하게 했으며 영어를 사용하여 예배하도록 하고 성경을 많이 실어서 교인으로 하여금 성서를 읽게하고 전국이 이 한가지 기도서만 사용하도록 하여 예배의 통일성을 기하였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기도서 내에 성경내용과 성서 읽기 표를 넣어 예배의 성서적 성격을 복구시킨 것이다. 이점에서 대륙의 개혁사상과 일맥상통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서 내용에 있는 격조 높은 언어, 그 높은 경건성, 기독교 역사의 유구성을 존경하는 태도 및 관용성은 이 책이 갖는 특징으로 그것은 바로 크래머 자신의 신앙과 인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후에 성공회가 갖는 보배로운 유산이 된 것이다.

    제 1기도서가 나오자 많은 찬반논쟁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많은 수의 과격한 개혁자들은 이 기도서를 중세 예배에 가깝다고 주장하였다. 크랜머 대주교는 내용을 더욱 단순화하고 개혁시대의 복음주의적 교리를 강조하여 다시 개정판으로 1552년에 제 2기도서를 만들었다. 변화된 내용의 몇 가지 예로서 교회법을 폐기하고 성직자 전용복장을 금지하고 영세식에서 어떤 식은 없애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삭제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헨리 8세의 첫 부인 카더린의 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여왕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다. 메리는 즉위하자 의회로 하여금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개혁법안을 폐기하게 하고 1529년 이전 상태로 복귀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카톨릭 예배를 실시하기로 하고 대부분의 주교들을 축출하고 로마 카톨릭계통의 주교로 배치하였다. 크랜머 대주교도 반역자로 몰려 투옥되었다. 이때 크랜머는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헨리 8세 때에 영국왕이 영국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원리를 자신이 주동이 되어 세웠는데 그 원리에 의하면 메리여왕에게 복종해야되고 그렇게되면 영국은 다시 로마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처음에는 죽음이 두려워 메리여왕에게 복종할 뜻을 비쳤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서 자신의 양심의 판단대로 법왕과 여왕을 모두 반대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즉 왕의 최상권을 부정하고 양심의 최고권위를 내세우고 의연하게 화형대 위에 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공회주의 핵심 속에 또 하나의 진리를 첨가한 것이다. 교회사가 '달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각 시대의 상상과 정신적 경험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 소리의 권위가 있다." 이미 조성되어 가고 있던 성공회주의 즉 역사적 계속성 또는 교회전통의 권위 속에 성서의 복음적 권위가 가하여졌고 이제는 세 번째로 성령의 역사로 인한 양심의 소리의 권위가 첨가해진 것이다.


    (4) 엘리자벳 여왕(1558-1603)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앤볼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벳은 메리여왕을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1559년에 열린 의회에서 엘리자벳의 왕위계승권을 합법화하였고 왕의 지상권(Act of Supremacy)과 영어기도서 사용의 영어예배를 의무화하는 신앙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가결했다. 엘리자벳이 당면한 우선과제는 평화와 안정이었다. 그래서 여왕은 교회와 왕국을 위해서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길을 가는 온건한 종교정책을 추구하였다. 여왕은 종교의식에 대해 미학적이고 감상적 취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급격한 종교적 변화를 체험한 그녀는 종교에 대해 보다 관용적이고 세속적 이해를 함께 추구하려 했다. 여왕은 캔터베리 대주교로 매튜 파커를 임명하였다. 그는 여왕의 어머니 앤볼린의 채플린이었고 종교개혁 지도자 마틴부서의 제자였다. 파커 대주교는 혼란 중에서 질서를 세우는 책임을 다하였는데 항상 온유한 태도로 메리여왕 계열의 로마교회 계통의 주교와 극단의 프로테스탄트의 독자적 태도를 옹호해 주었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잔재를 싫어하는 극단적 칼빈주의자와 청교도들의 일부는 국교 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불씨 역할을 하였다.

    파커주교가 광고(Advertisement)라는 책을 발행하여 교회에서 목회하는 성직자들이 예복을 입을 것과 영성체 때 무릎 꿇는 것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반대파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파커주교는 영국 국가교회를 재건한 엘리자벳 여왕에 의해 임명되고 사도적 계승의 합법적인 주교안수를 받아 온유와 관용으로 교회의 질서를 세워 엘리자벳여왕과 함께 영국교회를 정착하게 하는데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1563년 제 2차 의회에서 통일법을 재확인하고 같은 해 캔터베리에서 모인 성직자총회에서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교리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때 에드워드 6세 때 만든 42개 조항을 수정하여 소위 39개 조문(Thirty-nine Articles)을 만들었다. 이것은 영국교회 즉 성공회 신앙노선의 기본강령이라 할 수 있다. 이 신조는 극단주의적 입장을 배제하고 보다 원만한 입장으로 중도노선이라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 표현할 때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명확하게 부인하는 한편 즈빙글리적인 상징적 임재설도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앙의 근본으로 선언되었고 예정설은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극단적 칼빈주의 입장은 아니었다. 또한 연옥설 면죄설 등 로마교리는 헛된 것임을 명백히 했고 로마주교는 영국 영토 안에서 아무런 관할권을 갖지 않음을 명백히 하였다.

    엘리자벳 여왕이 정치 종교적으로 국가를 안정시키고 영국교회를 정착시키는 데에 합리적 변호와 옹호로 공헌한 학자들이 있으니 그 첫째는 죤 즈웰(John Jewel)이었다. 즈웰은 본래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있다가 메리여왕 때 교수직을 파면 당하고 대륙에 피신해 있다가 엘리자벳 여왕 때 돌아와 로마카톨릭교회에 도전하였다 그는 1562년에 영국교회의 변증(Apologia Ecclesiae Anglicana)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주장한 주요내용은 영국교회는 로마교회에서 분리된 것이지 옛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그리스도에게서 갈라져 나온 것이 아니라 했다. 그리고 최초 6세기동안의 교회역사에서 로마교회의 주장을 옳다고 인정할만한 증거가 있으면 한가지라도 대어 보라고 하였다. 즈웰의 책은 영국 내에서 크게 환영을 받아 각 교구에 비치하기도 했다.

    두 번째로는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를 들 수 있다. 후커는 '교회정체의 법칙'(Laws of Ecclesiastical Polity)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청교도 장로파와 로마 카톨릭에 대한 영국교회를 옹호하는 논증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기독교의 지파들을 우주에 충만한 합리적 원칙에 따라 화해를 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합리적 원칙은 성서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기에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합리적 원칙들은 하느님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영원한 법칙에서 보여지며 국가나 교회가 조직되는 인간의 법칙은 이 이성의 법칙과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필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적응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커는 성서의 배후에 이성이 있는 것처럼 영국교회 배후에는 고대로부터 계승된 카톨릭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교제도는 고대로부터 내려왔고 보편적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성례전도 가치있는 것으로 지켜야함을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즈웰이나 후커는 카톨릭주의와 로마주의를 분명히 구별하고 새로운 학문의 결론과 교회의 옛 교훈을 결부시키려 힘썼고 성서와 역사의 진리를 연합할만한 참된 길을 찾으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은 성공회가 생긴 이래로 교회역사를 통해 계속 추구해 온 바이기도 하다.

    III. 영국교회의 투쟁과 부흥

    (1) 17세기 영국의 교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은 정치, 종교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튜도왕조는 끊어지고 스튜워트 왕조가 왕위를 계승한다. 내란과 공화정치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는 상업경쟁의 시기로 변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의 종교가 반드시 하나의 국가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서서히 약화되고 지상에서 정치종교의 최상권을 가졌던 왕권에서 종교권은 이탈해 가는 변화가 오기도 한다.  사상적으로는 계시종교특색을 무시하는 자연신교사상이 만연되었고 계몽주의의 사상이 번창하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영국 성공회는 쇠퇴의 위험을 극복하며 계속 성장해 갔음을 보게 된다.

    제임스(James) 왕이 영국왕이 되어 스코틀랜드로부터 올 때 청교도들이 탄원을 내고 국교의 변화를 요구했다. 1604년 함프톤코트에서 주교들과 청교도들의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서 나타난 중요한 결과는 성서의 새로운 번역이었다. 이것이 1611년 발간되어 나왔는데 영어사용전의 표준이라 일컫게 되었고 소위 흠정판(King James Version) 성서라 불리워졌다.

    제임스왕 재임시 영국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이는 란셀로트 앤드류(Rancelot Andrews)였는데 그는 학자로서 그리고 기도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교회의식을 발전시켜 예전에 공헌한바 있다. 제임스를 뒤이어 1625년에 찰스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정국은 긴장과 불안에 싸이게 되었다. 왕과 대부분의 귀족들은 영국국교의 질서와 카톨릭 전통을 중시했고 이에 대항해서 의회의 급증하는 중산층과 청교도들이 합세하여 극단적 개신교세력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내란으로 인해 찰스왕은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가 재임 중에는 영국국교와 주교제도를 옹호하는 편에 서있었다. 이 때 성공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는 윌리암 로드(William Laud)였다. 로드는 옥스퍼드대학 교수와 학장을 지내며 학교의 면모를 일신시키는데 공헌하고 학교를 반청교도적이며 앵글리칸 정통신앙의 보루로 만들었다. 그는 런던주교를 비롯하여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했는데 특히 단정한 도덕과 예배의식을 강조했고 조정에 있는 주교들로 자신의 교구에 가서 살도록 했다.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도 참된 교회라 생각했으나 영국교회가 로마보다 더욱 카톨릭 신앙과 전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찬식 테이블은 미사제단으로 설치했고 칼빈주의를 반대하고 알네니안주의를 옹호했다. 교회의 부패와 싸웠고 로마교회와 청교도에 대항하여 종교의 일치를 도모하려했다.

    이와 같은 노려으로 그는 후에 앵글로 카톨릭 전통(Anglo-Catholic Tradition) 사상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 것이다. 스튜워트왕조가 들어서면서 청교도들은 국회와 동맹하여 절대권위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찰스 1세와 로드 캔터베리대주교는 사형대에서 처형되고 크롬웰이 호민관이 되어 공화정을 하는 동안 주교제도도 공도문 사용 예배도 폐지되어 영국성공회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크롬웰은 얼마 안 가서 끝나고 찰스 2세가 1660년에 왕위에 올라 왕정이 복고되었다. 찰스 2세는 명목상 수장으로 있는 영국교회 즉 성공회에 동조하여 주교제도를 부활했고 공화정 당시 쫓겨났던 주교들로 사도계승을 하게 했다. 수정된 공도문이 1662년에 의회에 의해 채택되었고 통일령을 내려 모든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조처했다. 이 시기에 영국성공회는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부흥되어 성직자들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영국교회의 일종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당시 찬송가 작가로 유명했던 죠지 헐버트(George Herbert)와 수도원식으로 경건생활의 모범을 보인 니콜라스 페과 그리고 훌륭한 문학가이며 신앙지도자인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등은 이 시대를 빛낸 사람들이었다.


    (2) 18세기 영국교회와 복음주의 운동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자연신교(Deism)로 표현되는 합리주의와 종교적 회의주의가 만연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교회는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신앙각성에 활기를 넣어준 이가 있었으니 죠지 버클리 주교는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논증을 작성하여 자연종교를 비판하였고 유명한 죠셉 버틀러(Joseph Butler)는 "자연의 과정과 법칙에 대한 자연내지 계시종교의 유추"란 책을 써서 자연신교사상을 반박하여 신앙의 변증을 보여주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연신교와 합리주의의 사상에 대한 반발로 경건주의와 맥을 잇는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죤 웨슬리는 그의 형제 찰스와 함께 대학시절 신성클럽을 조직하여 경건생활을 하다가 성공회 사제품을 받고 미국 식민지에 선교활동을 하였고, 유럽 경건주의 계통인 모라비안 형제단을 만나 영적감화를 받고 귀국했다. 1738년에 회심의 체험을 하고 적극적으로 전도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마침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도시와 공장지대에 인구의 급증으로 사회 혼란과 변화속에 있을 때 웨슬리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도운동을 펴서 새로운 부흥세력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세력이 강화되자 영국교회(성공회)는 경계의 눈으로 보게되었고 결국 이들은 성공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감리교(Methodist)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 지도자들은 원래 영국교회내 복음운동에 속하는 일부 성직자들이어서 영국교회에서 이탈했을 때 이들만 메도디스트라 불렀고 나머지 대부분은 복음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 메도디스트(후에 감리교)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류계급에 속했고 전도활동 범위는 지역을 초월하여 전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교회 복음주의 주된 세중심지는 런던과 클라팜과 켐브리지였는데 런던서 크게 활약한 이는 유명한 윌리암 로메인 이었다. 그는 학자로서 설교가로서 신앙서적을 저술하며 복음주의 활동을 통해 많은 감화를 주었다. 클라팜에서 사제로 활동하던 헨리 벤은 복음주의 원리에 충성하는 저명한 평신도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은행가이며 자본가인 헨리 토온톤, 동인도회사 사장인 찰스 그란트, 시에라의 총독인 즈가리 머콜리 등이었다. 이들은 유식했지만 특별한 신학은 없었고 신앙의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박애주의와 사회개선사업에 힘을 다했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부흥운동에 맞는 성가집을 출판하기도 했고 1780년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는 가난한 어린이를 위해 세계 최초로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창설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자연히 선교사업과도 관계를 맺게되어 1780년에는 교회선교협회를 조직하여 해외에 성공회를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1804년에는 성서협회, 유대인 전도를 위한 런던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노예매매의 폐지운동을 통해 정의에 대한 열정도 보여주었고 이와 같은 지도자들의 도덕적 진지성은 영국사회에 도덕적 표준을 고양시켜 주었고 사회경제적 개혁운동주의자들에게도 큰 힘을 제공해 주었다. 이들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은 온건한 칼빈주의 신앙입장이었지만 성공회를 사랑하고 전통적인 교리를 특히 39개신조를 충심으로 동조하였다.

    이들의 공헌은 당시 이신론과 합리주의 사상에 빠져 형식적인 면이 강했던 많은 수의 성공회 주교와 사제들에게 각성을 주었고 특히 성서연구의 열중과 관심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큰힘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이들 복음주의자들은 영국내의 잡다한 비국교파와 연합하였으며 따라서 당시 영국교회의 편협한 행동범위를 초월하도록 해주었다.


    (3) 옥스퍼드 운동과 앵글로카톨릭의 부흥

    19세기 들어서서 영국교회 즉 성공회는 안일과 무사주의에 빠져있었다. 성직자들은 복수교구제를 통해 여러 가지 지위를 갖고서 수입을 얻었으며 비거주 주교제, 예배 및 예전준수에 대한 태만이 만연되고 있었다. 영국교회내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을 계승하여 19세기 초에 와서도 가장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성서를 연구하고 종교문학을 출판하며 자선사업과 사회개혁에 계속 힘썼다. 반면에 이들은 사변적인 역사와 철학사상에 관심이 없었다. 성서를 하느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는 만족했어도 과학적 비판연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꾸준히 계속해서 영국교회 발전을 위해 많은 영향과 감화를 주었다.

    19세기는 영국교회에 있어 전반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가져다 준 시기라 할 수 있다. 1832년 의회에서 개혁법이 통과된 후 그간의 악폐들을 시정하여 성공회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여건에 효율적인 대처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영국교회감독관이란 단체가 조직되어 교구, 교회 성직자들의 각종 비리를 정비하게 하였다. 한편 영국교회 내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이른바 옥스퍼드 운동이었다.

    옥스퍼드운동은 신학적 운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교회적 운동으로 옥스퍼드의 사람들이 옛 고교회파의 교회주의를 그 당시 실제적 요청에 적용시키려고 한 운동이라 하겠다. 옥스퍼드운동의 선구자는 휴 제임스 로우즈였는데 그는 강연집을 통해 독일의 합리주의를 비판했고 브리티쉬 매거진을 창간하여 옥스퍼드운동의 기관지가 되게 했다. 또 한사람은 평신도학자인 알렉산더 녹스와 동료인 죤 제브 주교였다. 이들 가르침의 골자는 중도노선으로서의 앵글리칸이즘, 사도적계승, 그리고 교회의 보편성과 계속성을 보존하는 기초적 원리로서의 성공회예전 등이었는데 이것들은 옥스퍼드운동자들의 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본격적이 운동의 대표자는 뉴맨, 퓨지 그리고 케블이었다. 죤 헨리 뉴맨(John Henry Newman)은 교부신학연구와 고교회입장에 관심을 두었고 "트랙스"(Tract) 잡지의 주필로서 활약하였다. 나중에 로마교회로 개종하여 추기경이 되었다. 에드워드 퓨지(Edward Pusey)는 화육과 십자가에 대한 신비적 예전적 개념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으며 뉴맨의 개종이후 영국가톨릭(Anglo-Catholic) 세력을 규합하였다. 시인이며 신학자였던 죤 케블(John Keble)은 찬송시집에서 낭만주의학파의 자연상징주의에 대하여 기독교적 예전해석을 가하였다. 본격적인 운동은 대체로 세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기간에는 보수적이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교회의 영적본질과 독립성을 수호하는 문제를 다루었고, 둘째 기간에는 종교의 경건, 화육, 신비적 예전주의, 윤리적 금욕주의가 강조되어 이 운동의 특징을 드러내 주었으며 희랍교부들의 저서를 번역, 소개했으며 트랙(Tracts)가 논문집 구실을 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기간에는 교회의 진보적 이상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이들 가르침의 요점을 간추려보면 우선 이들의 노선은 반로마적인 동시에 반프로테스탄트로서 중도노선이었고 성찬에 관한 가르침에서도 로마교회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을 모두 거부하여 성공회의 전통에 충실했다. 삼위일체와 화육의 교리가 강조되었고 십자가에 대한 신비적 명상과 금욕적 이상을 강조하는 경건이 중요시 되었다. 이와 같은 옥스퍼드운동의 결과는 19세기 이후 영국성공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우선 후커의 낡은 국가적 교회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영국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영적근거와 사명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영국교회로 하여금 카톨릭적 유산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해주었다.

    이 운동자들은 주교제도의 사도계승 전통에서 카톨릭교회의 본질적 특징을 발견하려했으며 특히 성사와 예전을 중요시하여 합법적인 사도계승 전통에 따라 안수받은 성직자가 집전할 때만 유효하다고 했다. 초대교부의 글을 높이 평가하고 신학연구를 중요시했으며 신경에 나타난 신앙을 해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예전의 관습, 제복, 부품들을 부활시켰고 예배는 위엄과 아름다움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수도원제도를 부활시키고 사회적 열정을 가해 주었다. 특별히 희랍교부들에 관한 연구는 영국신학으로 하여금 화육론을 그리스도교 교리의 중심으로 삼게 해주었다. 옥스포드 운동은 결국 앵글로 카톨릭운동으로 승화되었고 일부 운동가들은 로마교회로 개종했으나 대부분은 영국교회에 남아 카톨릭전통을 강화시켰으며 특히 이들이 당시 영국의 여러도시에 살고 있는 빈곤계층을 위한 희생적 봉사활동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영국교회를 생명력있게 발전시키고 헌신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지만 앵글로 카톨릭운동과 맥을 잇는 측면에 한사람 대표로 찰스 고어(Charles Gore) 주교를 들 수 있다. 그는 1889년에 "룩스 문디"(Lux Mundi)란 책을 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카톨릭신앙을 현재의 지적, 도덕적 문제들과 조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성공회 신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지표가 되었다.


    (4) 세계선교와 발전

    이미 17세기 말부터 18세기초 해외식민지에 파송된 영국관리들 혹은 채플린 성직자들의 후원을 위한 협회가 1701년에 창설되었는데 그것이 해외복음전도협회(Society of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로서 그 후 본격적인 해외선교활동의 본부가 되었다. 1791년에는 복음주의 계통에서 설립한 선교단체인 교회선교협회(Church Missionary Socirty)가 있어 역시 해외식민지 선교사업을 추진했다. 17세기 초 미국 버지니아에 이주민들이 정착할 때 영국성공회는 특전을 가지고 교회설립을 하였고 그 후 사정은 달랐지만 미국확장에 따라 성공회도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성공회는 영국식민지에 정착한 영국인뿐만 아니라 영국으로부터 해방한 원주민과 타민족에게 전도하여 힘있게 확장되어 갔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식민지 시대에 이식된 교회였고 인도, 미얀마, 파키스탄, 스리랑카, 서인도제도에 있는 성공회는 식민지교회로부터 본토인들에 대한 전도가 확장되어 토착화된 성공회이다. 중국과 일본은 영국, 미국, 캐나다의 합동선교로 설립되었고 아프리카는 주로 영국선교에 의해 설립되었다. 오늘날 세계성공회는 과거 약 150년 간 외국에 확장되어나간 것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세계성공회는 공통된 신조의 신앙과 공도문예배로 서로 유기적인 연합관계를 맺고 있지만 대부분이 국가단위로 독립되어 있고 각기 특수성을 갖고 있다.

    19세기의 영국성공회에 대해 유명한 교회역사가인 케니스래토레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세기 특히 후반에 와서 영국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생명력이 풍부했으며 절정에 달했다. 학식과 신앙에 관한 성직자들의 보편적 자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영국교회는 로마와 분할한 이래 어느 때보다도 효율적으로 자기를 통제하였다. 새로운 학문에 적응하는데 있어서도 큰 역학을 했다. 영국교회는 매우 다양한 면모를 보였으니 극단적인 복음주의로 시작해서 성례전 집행을 높이 평가하는 카톨릭신앙까지 망라되었다. 유사이래 처음으로 영국교회는 세계적 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성공회역사를 고찰해 볼 때 성공회는 장구한 영국의 역사과정과 더불어 생존하고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풍부한 유산, 고대 영국토착교회의 열정적인 선교와 복음에 대한 유산, 로마교회로부터 받은 교리와 조직과 제도의 유산 그리고 종교개혁으로부터 받은 개혁사상의 유산, 정치, 경제, 사회를 중심한 인간과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받은 교훈과 유산, 이 모든 것들이 함께해서 오늘의 성공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도 세계성공회 내에는 로마카톨릭에 가까운 앵글로카톨릭전통의 고교회파(High Church)가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개신교전통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노선인 저교회파(Low Church)가 있고 이 양자 중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는 광교회파(Broad Church)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명확히 독립된 구별없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성공회는 세계성공회가 하나로 연합하는 중앙헌법이나 기구도 없고 각자가 독립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회는 교리문답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하나이며 거룩하며 공번된 공교회(One, Holy, Catholic Church)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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